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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책 10만 권 모아, 책방은 은퇴 후 놀이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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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22면

제천서 헌책방 여는 김기태 교수

김기태 교수. “혼자 힘으로는 10만권을 모으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수집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기태 교수. “혼자 힘으로는 10만권을 모으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수집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은퇴 후 자영업에 나섰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년의 이야기는 더이상 뉴스도 아니다. 그만큼 양질의 일자리, 이를 품을 만한 문화의 두터움이 우리에겐 부족하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 제천 세명대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김기태(59) 교수의 사례가 하나의 참조점이 될지 모르겠다. 30년간 10만 권의 책을 모았다고 했다. 주로 초판본, 그중에서도 1쇄 본이다. 이 귀한 책들을 모신 헌책방 ‘처음책방’을 직장인 세명대 인근 주택가에 조만간 문 연다. 널리 알려주십사고 사전에 보낸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흥미로운 장서와 자료 천지다.

‘최인훈 〈광장〉 초판본(1961년 정향사 발행)을 비롯한 김승옥, 박완서, 이문구, 이문열, 전상국, 조정래, 한수산, 한승원, 황석영 등 대표작가의 작품집을 포함한 소설책 초판 1쇄 본 수천 권’.

사료 가치가 있는 책은 안 팔아

책방 외부 모습. [사진 김기태]

책방 외부 모습. [사진 김기태]

이런 식으로 시집과 산문집이 각 수천 권씩(물론 초판 1쇄 본들이다), 각종 문예지와 교양잡지가 수백 권씩(역시 초판 1쇄), 한겨레신문 등 일간지와 일요신문 등 주간지의 창간호와 호외가 수백 종, 보물섬 같은 만화잡지, 주간만화 등 성인용 만화잡지 창간호까지 갖추고 있다고 했다. 수백, 수천. 이렇게 두루뭉수리 표현한 건 수집가 자신도 정확한 자료 숫자를 모른다는 뜻이다. 정리가 덜 끝나서다. 어쨌거나 초판 단행본이 5만 권, 각종 정기간행물이 1만5000종에 이른다는 것. 30년간 이런 일을 벌였다면 ‘우공이산(愚公移山)상’이나 ‘문화저변축적상’ 같은 걸 만들어 수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지난 17일 서울에 올라온 김 교수를 만났다. 뿌듯하겠다고 했더니 반응이 뜻밖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일이 너무 커졌다.”

“처음에는 소일거리, 은퇴 후 놀이터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는 것도 일이 커진 거잖나. 그래서 약간 중압감을 느낀다”는 얘기였다. 김 교수는 “대학 선생들 중에서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만 하다 은퇴한 다음 다른 일을 벌여 말아먹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나는 이제 정년 6년 남았는데, 평생 책 만지던 사람이니 책으로 끝을 내자 해서 대학에 와서 본격적으로 더 수집을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월간문예지 현대문학 과월호들. [사진 김기태 교수]

월간문예지 현대문학 과월호들. [사진 김기태 교수]

결심에도 한계는 있다. 뜻한다고 성사되면 자영업자 빈곤 문제는 생기지도 않았다. 30년에 10만 권이면 1년에 3000권꼴, 하루 10권씩 매일 모아야 한다. 어떤 대목에선가 뭉텅이 수집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려다 보니 김 교수의 인생역정까지 슬쩍 넘겨보게 됐다.

1988년 경희대 국문과 82학번 김기태는 졸업 후 삼성출판사에 입사했다. 당시 맡은 편집 일이 이 출판사의 등불 신세대소설선. 그런데 1번으로 낸 채희문의 소설 『철탑』의 판매가 영 신통치 않았다. 벌써 헌책으로 나도나 싶어 청계천을 둘러보다 뜻밖의 책을 만났다. 교양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의 76년 창간호였다. 같은 이름의 출판사 뿌리 깊은 나무는 편집자들이 선망하던 곳이었다. 처우가 좋은 데다 가로쓰기, 한글 편집 등이 혁신적이어서다.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폐간호까지 53호 전권을 모아보자. 30년 여정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절반가량을 모았을 뿐이었다고 밝혔다. 아날로그의 막다른 골목은 의외로 디지털이 출구였다. 인터넷 헌책방에서 전권을 발견하고 한꺼번에 사들였다는 것. 마디 굵은 두 손으로 쌀알을 한껏 모아쥔 표지의 창간호부터, 갑자기 폐간되는 바람에 종간사도 없이 표지에 미륵보살 사진을 실은 마지막 호까지, 잡지의 한 시대를 구비하게 된 사연이다.

김 교수는 스스로 국내 첫 출판평론가라 자부한다. 96년 한국출판연구소가 주는 첫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다. 그에 앞서 94년엔 저작권 관련 첫 석사학위를 따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헌책 수집한다고 소문내고 다니니까 도움 주는 분들이 있었다”고 했다.

각종 정기간행물들. [사진 김기태 교수]

각종 정기간행물들. [사진 김기태 교수]

신문발전위원장을 지낸 언론인 김호준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어느날 불러 도저히 통제 불능이라며 한 무더기를 안기더라고 했다. 평생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모은 책들이다. DJ의 『옥중서신』 사인본 등이 들어 있었다. 30년 넘게 한국잡지협회에 몸담았다 몇 해 전 별세한 권오중 전 사무국장은 줄잡아 4000~5000권의 잡지를 내놓았다. 납본하며 별도로 챙겨뒀던 것들이다. 생전 거주하던 전농동 아파트로 한가득이어서 학생 한 명과 함께 1.5t 트럭 두 대로 실어날랐다고 했다. 여기서 예비 은퇴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말고, 모름지기 손이 하는 일은 널리 널리 알리자.

김 교수는 헌책을 살 때 바가지 쓰지 않는 요령도 귀띔했다. 상식적이지만, 마음에 든다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 그저 그런 두 권 사이에, 정말 갖고 싶은 한 권을 끼워 넣어 세 권을 심드렁하게 사는 척하는 것도 방법이다.

헌책방이니 당연히 팔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책을 파는 건 아니다. 소설 『광장』 초판본은 200만원 가격표를 붙여놓긴 했지만 팔지는 않는다. 사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34년 일본에서 출간된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児島高等農林学校) 개교 15주년 논문집은 가장 오래된 자료다.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 선생의 글이 실려 있다.

96년 첫 한국출판평론상 수상

처음책방의 내부 모습. 미처 정리가 덜 된 모습이다. [사진 김기태 교수]

처음책방의 내부 모습. 미처 정리가 덜 된 모습이다. [사진 김기태 교수]

빛바랜 헌책만 파는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출간된 책도 많다. 그런 책을 싸게 판다. 어쨌거나 책방 유지는 되는 것일까. 책방은 규모가 작지 않다. 대지 200평, 건평 40평의 단층 건물이다. 임대료가 작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김 교수는 “지역의 명소가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주변에 의림지가 멀지 않아 관광명소다. 호기심에 책방을 찾은 사람들이 운영자의 열정 때문에라도 책을 사지 않겠느냐는 거다. 수익이 나지 않는 경우에 대비해 펀드도 들어놨다고 했다. 예비 은퇴자를 위한 두 번째 교훈. 무슨 일이든 사전에 계획이 있어야 한다.

김 교수는 말했다. 은퇴자 혹은 나이든 이를 위한 생활수칙이라고 해도 좋겠다. ①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자. ②쓰고 싶은 글만 쓰자. ③읽고 싶은 책만 읽자.

쉽게도, 어렵게도 느껴진다. 김 교수는 “책방은 그런 삶을 실현하는 도구다. 사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망하든 흥하든 계속 유지할 생각”이라고 했다. 은퇴자 세 번째 교훈은 뚝심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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