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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고기 빠진 샤부샤부 밀키트지만 괜찮아…인생도 그런 것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재동의 아빠는 밀키트를 좋아해(10·끝)

‘만원의 행복’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새천년이 밝았을 무렵 인기를 얻었는데, 연예인들이 만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형식이었다. 불과 십수 년 전에는 만원으로 일주일을 버텼다는데(물론 그 당시에도 무리한 컨셉이었다) 지금은 점심 한 끼에도 만원으로는 영 부족하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곁들인다면, 점심값도 상당한 부담이다.

밥벌이의 유일한 낙을 점심 시간으로 여기고 살아왔지만, 올라버린 물가에 가성비를 생각하게 된다. 가성비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메뉴가 있다. 바로 샤부샤부 체인점의 점심 특선이다. 만 원 남짓한 가격으로 약간의 고기와 채소, 만두, 두부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준비된 재료를 다 먹으면 이어서 우려진 국물에 칼국수를 삶아 먹는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남은 국물에 밥과 달걀 등을 풀어 죽을 만들어 먹어야 비로소 제대로 샤부샤부 코스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끼의 식사지만 마치 만화영화 속 로봇처럼 3단 변신을 한다. 왠지 모르게 크게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칼국수와 죽까지 샤부샤부는 한끼에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다. [사진 이마트몰]

칼국수와 죽까지 샤부샤부는 한끼에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다. [사진 이마트몰]

풍성한 샤부샤부를 기대하고 고른 밀키트지만, 뼈아픈 실수가 있었다. 내가 산 밀키트는 고기나 해산물 등 메인 재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샤브샤브 재료’ 밀키트였다. 처음에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대충 보고 사버린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어쩐지 싸다 했어!” 그리고 남 탓이 이어진다. “밀키트는 편하게 해먹으려 사는 건데 번거롭게 따로따로 사게 만들면 어떻게 해!”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집에는 왔고 날씨도 쌀쌀해서 도저히 다시 고기 사러 나가지는 못하겠다.

그냥 채식한다고 생각하고 고기 없이 샤부샤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차라리 밀키트에 ‘채식 샤부샤부’라고 쓰여있었다면 나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고기는 없지만, 아직 칼국수와 달걀죽은 해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조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밀키트에는 생칼국수 면이 있었다. 집에 있는 찬밥과 달걀로 죽도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샤부샤부 밀키트 조리법

① 들어있는 채소와 버섯을 깨끗이 씻고 알맞은 크기로 자른다.
② 물 1500mL에 동봉된 샤부샤부용 소스를 넣고 끓인다.
③ 채소와 버섯을 국물에 익혀 동봉된 간장소스 / 칠리소스에 찍어 먹는다.
④ 남은 육수에 칼국수를 넣고 5분간 끓여서 먹는다.

사실 채소와 버섯을 씻어 준비하는 것 말고는 조리라고 할만한 게 없다. 이 밀키트를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아마도 육수 소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는 채소, 버섯, 간장소스, 칠리소스로 집에 있거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샤부샤부는 먹으면서 조리하는 음식이기에 우선 채소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다.

배가 찼다고 칼국수를 포기할 순 없다. 들어있던 육수 소스 덕에 국물이 짭짤해서 그냥 끓여도 좋지만,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추가하길 권한다. 빨갛게 우러난 국물에 마늘 향이 배인 칼국수를 먹으면 명동칼국수가 부럽지 않다. 고기가 빠진 아쉬움이 조금 달래지는 것 같다. 오히려 채식하는 분께는 꽤 괜찮은 한 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칼국수를 다 먹어도 국물이 상당히 남게 되는데, 적당량을 덜어서 찬밥과 달걀을 넣고 죽을 끓이면 이게 또 별미다. 육수가 짭짤하기 때문에 죽에 따로 소금으로 간하지 않아도 된다. 샤부샤부 전문점에서 넣어주는 다진 채소가 빠진 것이 아쉬웠는데, 다음에 또 먹는다면 샤부샤부용 채소를 조금 덜어서 죽을 할 때 넣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채식 샤부샤부를 먹게 되었다. [사진 한재동]

어쩌다 보니 채식 샤부샤부를 먹게 되었다. [사진 한재동]

그간 밀키트를 사면 되도록 레시피에 적힌 대로 조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항상 메뉴얼 대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기 빠진 샤부샤부 밀키트 덕에 채식 샤부샤부를 해먹게 되었다. 계획은 틀어지고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히려 정해진 조리법에서 벗어나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니 나만의 요리가 된 것 같다.

밀키트 요리하면서 말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어쩌면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닐까? 계획대로만 되는 삶이 어디 있으며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보 같은 실수를 덮으려는 헛소리라고 타박하는 분도 있겠지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귀여운 실수로 자책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 나를 토닥여주는 건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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