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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의 반체제 감독, 왜 ‘중국몽’ 연출가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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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폐막식 감독 장이머우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성화대 모습. [UPI=연합뉴스]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성화대 모습. [UPI=연합뉴스]

“아이들이 눈꽃과 함께 하얀 비둘기 모형을 들고 춤을 추는데, 내게는 그 비둘기가 트위터 마스코트와 닮아 보여서, 중국에선 트위터가 공식적으로 불법이라는 사실만 떠올리게 해주었다.”

미국 연예잡지 ‘할리우드 리포터’의 TV평론가 대니얼 핀스버그가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 리뷰를 쓰면서 빈정거린 말이다.

중국의 영화 거장 장이머우(71)가 연출한 개회식은 서구 언론들에서 대체로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그가 2008년 연출한 여름올림픽 개회식의 경우, 강화된 국가주의에 대한 우려에도 그 장려함으로 찬사를 받았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올림픽은 지난주 그가 감독한 폐회식과 함께 막을 내렸다. ‘세계인의 화합’이라는 올림픽 취지가 무색하게 국가들간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상태로….

신장 위구르 출신의 성화 점화자
‘감상주의로 정치도발 포장’ 비난
1990년대 체제비판 특색 사라져
최근엔 ‘항미원조’ 영화도 만들어

시진핑의 프로파간다 뒷받침

장이머우

장이머우

팬데믹으로 예산과 참여 인원이 한정된 상황을 고려하면 장이머우는 무난하고 깔끔하게 개·폐회식을 연출한 편이었지만 중국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몇몇 장면과 엮여 거센 비판을 받았다. 특히 공격이 쏟아진 장면은 개회식의 하이라이트인 성화대 점화였다.

성화대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거대한 불그릇 모양의 기존 성화대 대신 눈꽃 조형물 가운데에 성화봉을 꽂아 넣은 “역대 가장 소박한 성화대”의 경우, 너무 임팩트 없다는 평도 있었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선구적인 성화대라는 찬사도 많았다. 선수단이 입장할 때 사용한 91개 참가국 이름이 적힌 육각형 팻말을 재활용해 거대한 눈꽃 조형물을 구성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호평을 받았다.

문제는 성화봉을 꽃은 최종 봉송 주자 중 한 명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에서 집단학살과 인권탄압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그 때문에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이번 올림픽에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신장 위구르 출신 선수를 성화 점화자로 내세운 것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정하고 반발하는 정치적 도발로밖에 보일 수 없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수석 영화평론가 앤 호너데이는 그 장면에서 “장이머우다운 모호함의 미학이 발휘됐다”면서 이 노골적인 정치적 도발이 소박한 눈꽃송이 성화대에 의해 한결 부드러워지고 감상적이 되었다고 평했다. “영화 팬들에게 이건 전형적인 장이머우 방식인데, 논쟁을 의도하지만 순진무구함 속에 숨어서 공격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라며 장이머우가 1990년대에 했던 인터뷰를 인용했다. “나는 법규들을 우회해가는 중국식 방법에 익숙하답니다.”

문제는 장이머우의 이런 모호함과 우회법이 그의 90년대 영화들에서는 중국 당국의 검열을 피해 체제와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반면, 이제는 중국 시진핑 정부의 내셔널리즘 프로파간다를 미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묘한 정치적 우화였던 ‘홍등’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홍등’(1991)의 한 장면. [사진 IMDB]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홍등’(1991)의 한 장면. [사진 IMDB]

중국 제5세대 감독의 대표 주자인 장이머우는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으로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작품상)을 수상한 후, ‘국두’(1990), ‘홍등’(1991), ‘귀주 이야기’(1992), ‘인생’(1994) 등 수작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국제영화제 상을 휩쓸고 거장 칭호를 얻게 되었다. 본래 촬영감독이었던 그는 미장센, 즉 영화 장면 속의 구성과 배치에 탁월하며, 색채와 구도가 강렬한 미장센을 통해 사회 상황과 인물 심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왔다.

그런 장이머우의 미장센이 특히 돋보이는 영화가 ‘홍등’이다. 192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신여성이며 대학생인 주인공 쑹롄(배우 궁리)이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어느 봉건적 대갓집의 ‘넷째 부인’, 즉 첩으로 들어가서 겪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자칫 막장 드라마나 신파적인 멜로드라마가 되기 쉬운 설정이지만, 이 영화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롱숏 영상과 건조하고 냉연한 분위기를 통해 ‘처첩갈등’ 스토리를 넘어서서 거대한 ‘갑’의 통제와 갑이 던져주는 당근을 두고 싸우는 ‘을’들끼리의 하찮고도 처절한 권력다툼을 보여준다.

이 대갓집에는 몇 가지 ‘가풍’이 있는데, 매일 밤 대감이 어느 부인의 별채로 갈지 고르는 의식이 있고 대감과 하룻밤을 보내는 부인은 별채 안팎에 온통 홍등을 밝히고 하인으로부터 최고의 발마사지 서비스를 받고 다음 날 아침식사의 메뉴를 고를 권리를 얻는다. 대학생 출신인 쑹롄은 이 알량한 풍습과 특혜를 처음엔 가소롭게 생각하지만, 대감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그 특혜를 받지 못하자 다른 부인들과 하인들의 조롱과 수군거림을 받게 되고 그걸 참지 못해 자신도 서서히 권력다툼에 끼어들게 된다.

문제는 쑹롄이 둘째 부인처럼 간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첫째 부인처럼 모든 걸 내려놓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권력사회에 들어와 그 부조리를 비웃지만 결국 알량한 권력에서 배제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권력다툼에 뛰어드는, 그러나 독하게 권력을 추구할 위인도 못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지식인의 상징이다.

이 대갓집의 높다란 벽과 담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구조는 탈출하기 힘든 봉건제도와 권력 시스템을 상징하고, 영화 내내 등장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결코 얼굴이 클로즈업되지 않는 대감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 자체이자 거대한 ‘갑’의 상징으로서 나타난다.

셋째 부인이 간통죄로 ‘가풍’에 따라 죽임을 당했을 때 쑹롄은 지식인으로 진정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셋째 부인을 밀고한 둘째 부인 대신 대감을 향해서 “너는 살인자야!”라고 반복해서 외친다. 처음으로 시스템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스템을 뒤엎고 혁명을 일으킬 힘도 이 시스템에서 달아날 힘도 없다. 결국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는 광기뿐이었다. 문화대혁명(1966-76)과 톈안먼(천안문) 사건(1989)의 소용돌이에서 반복되어온 무력한 지식인의 비극에 대한 절묘한 우화인 셈이다.

예술의 정치화 vs 정치의 예술화

90년대에 이런 영화를 만들던 장이머우는 2000년대 들어 중앙권력과 중화주의를 은근히 예찬하는 무협영화 ‘영웅’(2002)를 만들어 ‘변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화면에 온통 금칠한 것 같은 물량공세와 인해전술의 끝판왕 영화 ‘황후 화’(2006)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습작 영화로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장이머우의 작품세계는 점차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뜻하는 ‘중국몽’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2008년과 2022년 올림픽 개·폐회식은 그 정점인 셈이다.

물론 지난달 국내에서 개봉한 ‘원 세컨드’(2019)를 들어 장이머우가 변절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들도 있다. 문화대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원 세컨드’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사막을 가로질러 오지 마을에 나타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영화 본편에 앞서 상영되는 뉴스영화에 헤어진 딸의 모습이 1초(원 세컨드) 비친다는 모습을 듣고 불원천리 달려온 것이다. 여기에 동생을 위해 영화 필름을 훔쳐야 하는 소녀, 영화 한 편에 울고 웃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얽혀서 휴먼드라마가 이루어진다.

‘원 세컨드’는 2019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출품됐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철회되었는데, 아마도 문화혁명 등의 묘사에서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으로 추정되면서 ‘장이머우가 다시 은밀한 체제저항으로 돌아온 것인가’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잠깐! 이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이 울고 웃는 영화는 소위 ‘항미원조(抗美援朝)’ 영화의 원조 격인 ‘영웅아녀’(1964)다.

게다가 장이머우는 최근에 딸과 공동연출로 항미원조 영화인 ‘저격수’를 내놓았다. 영화의 주인공인 장타오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편에서 32일 간 436발의 총탄으로 미군 214명을 사살하거나 다치게 한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장이머우 스튜디오에 따르면 “참전 용사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불러일으키고자” 만든 영화라 하니, 북한이 시작한 전쟁에 중국이 수많은 자국의 젊은이를 보내 희생시킨 것을 비판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리라.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예술이 정치화할 필요가 있으나 정치가 예술화하는 것은 파시즘의 짓이라고 했다. 장이머우의 90년대 작품들의 절묘한 정치적 알레고리가 예술의 정치화라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은 파시즘의 미화, 즉 정치의 예술화다. 그의 옛 영화들의 팬으로서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