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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 집마다 태극기 펄럭이는 항일운동 성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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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전남 완도군 소안도에서는 1년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주민들이 스스로 실천하는 운동의 하나다. 사진은 달목공원 태극기. 친환경 부표 2420개로 호수 위에 대형 태극기를 띄웠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에서는 1년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주민들이 스스로 실천하는 운동의 하나다. 사진은 달목공원 태극기. 친환경 부표 2420개로 호수 위에 대형 태극기를 띄웠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는 태극기 섬이다. 1년 365일 집집이 태극기가 펄럭인다. 길가에 태극기가 줄 서 있고 호수에도 태극기가 떠 있다. 소안도 태극기는 여느 관광지의 이색 볼거리와 차원이 다르다. 항일 운동의 전통을 잇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어서다. 이 섬에서만 독립유공자가 22명이 나왔다. 3·15 완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섬답게 지금도 3월 15일이면 주민 스스로 태극기 흔들며 행진한다. 삼일절을 앞두고 소안도를 갔다 왔다. 섬에 밴 항일운동의 흔적보다, 섬 주민의 자긍심이 더 기억에 남았다.

배달의 민족

2월 17일 소안도 월항마을. 이 사진에서만 태극기가 9기 보인다. 소안도에서는 국경일이 아니어도 집집이 태극기를 내다 건다. 다른 지역에선 낯선 풍경이겠으나 소안도에선 당연한 일상이다.

2월 17일 소안도 월항마을. 이 사진에서만 태극기가 9기 보인다. 소안도에서는 국경일이 아니어도 집집이 태극기를 내다 건다. 다른 지역에선 낯선 풍경이겠으나 소안도에선 당연한 일상이다.

여객선 이름은 ‘대한호’였다. 소안도 여객선은 모두 세 대가 있는데, 이름이 ‘대한호’‘민국호’‘만세호’라고 했다. 소안도 어귀에 구도가 보였다. 열 가구나 살까 싶은 이 작은 섬에서 국내 스타트업계의 전설이 태어났다. 구도는 ‘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46) ‘우아한형제들’  의장의 고향이다. 취재에 동행한 ‘완도뉴스’ 박주성 편집국장의 설명을 인용한다.

“소안도 항일운동을 주도한 단체 중에 배달청년회가 있습니다. 현재 완도군 12개 청년회 중에서 소안도 청년회만 이름에 ‘배달’이 들어갑니다.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요. 김 의장도 ‘배달의민족’의 모태가 소안도 배달청년회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작년엔 김 의장이 완도군 중·고교 학생을 위해 태블릿PC 1838대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소안도에 딸린 작은 섬 구도.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의장의 고향이다.

소안도에 딸린 작은 섬 구도.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의장의 고향이다.

대한호가 소안항에 도착했다. 선착장 어귀에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새긴 기념비가 서 있었다. 소안배달청년회가 세운 기념비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수의위친계·배달청년회·살자회·일심단 같은 단체가 이끌었는데, 교사 출신 독립운동가 송내호(1895∼1928) 선생이 이들 단체를 모두 조직했거나 주도했다. 1919년 3월 15일 완도 만세운동도 그가 앞장섰다.

소안도 주민은 송내호 선생을 순교자처럼 받든다. 실제로 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월 15일 소안도에서 태극기 행진을 할 때 반환점이 송내호 선생 묘역이다. 행진을 시작하는 항일운동기념공원에서 묘역까지는 약 2.3㎞ 거리다. 소안항일운동 기념사업회 김광선(66) 회장은 “섬 주민 2600여 명 중 절반 정도인 1000여 명이 태극기 행진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소안도 여객선 ‘만세호’.

소안도 여객선 ‘만세호’.

소안항 선착장에서 나오자 도로 옆으로 태극기 수십 기가 휘날린다. 길가에 심은 나무는 무궁화라고 한다. 여름에 소안도에 들면 무궁화 활짝 핀 꽃길을 지나게 된단다. 방파제를 따라 도로가 이어진다. 왼쪽이 민물을 담은 달목공원이고 오른쪽이 다도해 바다다. 달목공원 호수에 대형 태극기가 떠 있다. 가로 18m 세로 12m 크기의 태극기다. 모두 2420개 부표로 만들었다고 한다.

항일운동기념공원에 도착했다. 소안도 항일운동 유적 대부분이 기념공원에 몰려 있다. 특히 사립소안학교는 소안도 항일운동의 진원지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1909년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소안도 토지 소유권이 조선 왕족 이기용에게 넘어가자, 주민들은 4년의 준비를 거쳐 법적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1921년 13년에 걸친 소송 끝에 승리했다. 소송에서 이기자 소안도 주민은 성금 1만454원(현재 1억원 상당)을 모아 1923년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도 학교는 일장기를 걸지 않았고 일제 국경일에 학교를 열었다. 일제는 1927년 사립소안학교를 강제 폐교했다.

주민은 폐교 반대 운동에 나섰고 일제는 탄압을 자행했다. 그 결과 수많은 주민이 투옥됐다. 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중배(75)씨는 “그 시절 연인원 300여 명이 잡혀갔는데, 감옥에 끌려간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주민들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이불을 덮지 않으며 의지를 불태웠다”고 말했다.

소안항일운동 기념탑. 주민 성금을 종잣돈 삼아 2005년 기념탑을 세웠다.

소안항일운동 기념탑. 주민 성금을 종잣돈 삼아 2005년 기념탑을 세웠다.

소안도는 독립유공자 22명과 애국지사 69명을 배출했다. 항일운동사보다 더 위대한 건 남다른 전통을 지키려는 주민의 노력이다. 성금 300만원을 종잣돈 삼아 소안도는 2003년 소안항일운동 기념관을 열었고, 2005년에는 기념탑과 사립소안학교 기념관을 세웠다. 집마다 365일 태극기를 내다 걸고 길가에 무궁화를 심기 시작한 것도 그맘때부터다.

소안항일운동 기념관 내부 천장의 태극기.

소안항일운동 기념관 내부 천장의 태극기.

섬 남쪽 물치기미 쉼터에 들렀다. 깎아지른 해안절벽 위에 들어선 전망대다. 멀리 길게 누운 당사도가 보였다. 섬 왼쪽 끄트머리에 등대가 서 있었다. 1909년 소안도 주민들이 일본인 4명을 처단한 현장이다. 당사도 앞바다는 일본과 목포를 잇는 물길이었다. 저 고운 바다마저 수탈과 항쟁의 현장이었다. 소안도에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정보

항일의 섬 소안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항일의 섬 소안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소안도 들어가는 배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뜬다. 오전 7시께부터 1시간에 한 번 출발한다. 뱃삯은 어른 7700원, 승용차 2만원. 완도와 소안도는 직선거리로 약 20㎞로 배 시간은 1시간쯤 걸린다. 차를 갖고 섬에 들어가는 게 편하다. 섬에 대중교통이 있으나 형편이 좋지는 않다. 소안면사무소가 있는 비서리에 모텔과 식당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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