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중권 칼럼

"안치환, 뭘 꿈꾸고 뭘 탐하나"···'껍데기는 가라' 신곡 아이러니

중앙일보

입력 2022.02.24 00:43

업데이트 2022.02.24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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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안치환이 신곡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을 닮은 그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다. ‘왜 그러는 거니/ 뭘 꿈꾸는 거니/ 뭘 탐하는 거니.’ 대통령 후보 부인도 검증의 대상이니, 노래로 그를 비판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비판의 논리와 방식이 대단히 부적절하고 비합리적이라는 데에 있다.

사실 김건희씨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많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영부인 리스크’를 말하겠는가. 안희정 성추행 옹호 발언, 경력 위조 및 학력의 과장, 무속신앙에 대한 의존,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 등등. 그런데 왜 이 모든 좋은 소재들을 제쳐 두고 하필 얼굴 성형을 조롱의 포인트로 선택했을까?

민중가수 안치환, 여성 성형 조롱
수구적 혐오 깔린 부적절한 태도
이어 ‘반봉건 반제국’ 신곡 발표
그가 외친 껍데기가 자신일 수도

성형수술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제 얼굴에 칼을 대는 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노래는 미학적 풍자라기보다는 정적(?)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정치적 선동에 가깝다. 더 고약한 것은 그 선동의 바탕에 수구적인 여성 혐오의 시선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힘없는 이들을 대변해야 할 민중가요의 전통이 고작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남성주의적 편견에 기반한 정치적 흉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진보의 최종적 파탄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이 정권에서 시작된 진보의 논리적·윤리적 파국이 이 노래를 통해 미학적으로 완결된 것이다.

이 곡이 발표되자 정치색이 짙은 한 보수신문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 민중가수가 연남동에 건물을 네 채나 소유한 부동산 부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올렸다. 이 신문도 참으로 징그러운 것이, 그가 2020년에 진보의 위선을 비판한 ‘아이러니’를 발표했을 때는 그의 용기를 칭송하는 장문의 기사를 올린 바 있다.

아무리 민중가수라도 ‘엔터테이너’로서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재테크를 해 자식에게 건물을 물려주는 것도 딱히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다만 진보의 위선을 비판할 줄 알았던 민중가수가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아이러니’가 다소 민망하게 느껴질 뿐.

그 곡을 발표한 지 1주일 만에 안치환이 다시 신곡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에 곡을 붙였단다. 곡에 붙인 그의 멘트가 인상적이다.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강렬한 의지와 민족분단 극복을 염원하는 최고의 시에 감히! 곡을 붙였다. 이제 고개를 내려가 뜨겁게 노래하는 일만 남았다.”

실세계에서 안치환은 건물 네 채를 소유한 부동산 부자이지만, 상상계 속에서 그는 여전히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치켜든 민족해방의 투사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그 건물들은 임대를 놓았을 테고, 임대료의 핵심은 결국 지대이고, 지대라는 게 사실 자본주의가 아직 청산하지 못한 봉건잔재이기 때문이다.

가수가 신곡을 발표한 지 1주일 만에 다시 새 곡을 내놓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앞의 노래가 거센 비난을 받으니 곧바로 또 다른 노래로 그 민망한 노래를 덮어버리려 한 것일까? 아니면 언론에 폭로된 현실의 자아를 서둘러 상상계 속의 이상적 자아로 덮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자면, 세태에 물들어 흐려진 정신을 다시 추슬러 그 옛날 민중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각오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다시 소환한 그 초심이, 즉 “반봉건 반제국주의”와 “민족분단의 극복”이라는 구호가 이 시대에는 이미 시대착오로 느껴진다는 데에 있다.

조국,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윤미향 사태가 연이어 터지던 시절 “일푼의 깜냥도 아닌 것이 눈 어둔 권력에 알랑대 콩고물의 완장을 차셨다.”(‘아이러니’)고 일갈했던 그였다. 그런 그마저도 그 부패하고 위선적인 이들이 쥐고 있는 권력이 보수당으로 넘어가는 것만큼은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는 안치환이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속한 ‘세대’의 한계로 보인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한 정당이 잘못을 하면 정권이 다른 정당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권력을 넘겨받은 정당 역시 통치를 잘못하면 권력을 내려놔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합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게임규칙이 아니던가.

그런데 안치환이 속한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 당연한 규칙을 매우 낯설게 여긴다. 그들은 정권이 보수당으로 넘어가는 것을, 식민지 봉건의 친일·친미 분단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란의 상황으로 표상한다. 국권을 빼앗기는 상황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5월이라고 다르겠는가. 5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야 한다. 그리고 가야 할 그 ‘껍데기’가 혹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진영을 가르지 마라. 갈라진 두 진영이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을 할 때, 바로 그때 두 진영이 상대의 심장을 겨눈 그 징그러운 “쇠붙이”도 가고 온 나라에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을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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