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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깨알 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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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사회에디터

장주영 사회에디터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이 있다. 계약서에 인쇄된 큰 글씨와 달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촘촘하게 박힌 깨알 글씨가 그렇다. 영어로는 파인 프린트(fine print)라고 하는데 케임브리지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경우에 따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sometimes in the hope that it will not be noticed)으로 작게 인쇄된 계약서 본문의 글씨’라고.

몇 년 전까지 TV만 틀면 나왔던 ‘상담만 받아도 에어프라이어를 준다’는 보험 광고에서는 깨알 글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흘러나왔다. 깨알 글씨로 적힌 ‘가입 시 유의사항’을 매우 정확한 발음이지만 도저히 일반인이 말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식이다. 소비자 불만이 커지면서 2018년 9월 금융위원회는 글씨를 키우고 낭독 속도를 느리게 하며, 어려운 용어를 쉽게 바꾸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합격자수 1위’ ‘공무원 1위’라고 광고했던 교육 서비스업체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철퇴를 맞았다. 유명 개그맨이 부른 중독성 있는 광고송 ‘공무원 시험 합격은 ○○○’로 유명한 업체다. 이 업체는 버스 외부에 ‘공무원 1위’라고 광고했는데, 합격자수가 아닌 여론조사기관의 선호도·인지도 설문 결과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을 깨알 글씨(광고의 4.8~11.8% 면적)로 안내하긴 했다. 매의 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깨알 글씨를 읽기 위해서 달리는 버스를 멈춰 세워야 할 판이다.

이렇듯 꼼수로 숨겨둔 깨알 글씨는 판매자에 유리한 정보만 노출하는 소비자 기망 행위다. 당연히 정부가 피해 예방과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로 모든 광고와 계약서의 형식을 규격화·표준화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규제를 피해 기상천외한 변종 깨알 글씨가 계속 생겨날 가능성이 크기에, 소비자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대선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도 마음에 안 든다’는 지지 후보 없는 유권자라도, 후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있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 뒤에,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고 조용하게 숨겨둔 깨알 글씨가 있을지 모른다. 눈과 귀를 활짝 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