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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조각씩 우크라 삼킨다…"푸틴의 회색전술, 이번엔 만만찮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의 '회색' 전술이 유럽을 휩쓸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유화책과 동시에 군사적 행동을 단계적으로 높이며, 우크라이나를 서서히 옥죄고 있다. 미·러 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 한 서방은 고민에 빠졌다.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친러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DPR)·루한스크(러시아어 루간스크, LPR) 지역의 독립국가 승인과 함께 러시아군 진입을 명령했다. 서방 외교가와 외신은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쥐어짜기' 전쟁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막대한 비용과 대가가 따르는 전면전보단 '한 단계씩 해체하는' 식으로 반러 성향 우크라이나 정부 전복 전략을 구사 중이라는 시각이다.

22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전차 한 대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전날 푸틴은 이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며, 러시아군 배치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연합]

22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전차 한 대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전날 푸틴은 이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며, 러시아군 배치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연합]

또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내려진 푸틴 대통령의 결정은 전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미·러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언급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왔다는 점에서 그간 러시아가 구사한 '치고 빠지기'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오는 24일 예정된 미·러 외교 수장 회담은 먹구름이 짙어졌으며, 정상회담도 불투명해졌다.

러시아가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의 분리 독립 인정 후 보인 행동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 2008년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 남오세티아 분리독립 과정의 복사판이다. 이날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러시아의 행태가 예전 조지아에서 썼던 전술을 연상케 한다고 전했다. 조지아는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2008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원했지만, 정해진 일정은 없었다. 또 조지아는 러시아의 침공 후 분리된 남오세티아·압하지야 지역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러시아군이 끼어든 분리주의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는 이를 승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러시아 크렘린궁에서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는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러시아 크렘린궁에서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는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

앞서 20일 NYT는 푸틴 대통령의 "실행만 남은" 일정엔 전면전과 '한 조각 한 조각 해체하기' 또는 '비단뱀처럼 쥐어짜기' 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전면전보단 우회적인 전략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 행정부 관리는 NYT에 "푸틴은 자신이 목표를 가능한 작은 희생으로 달성하기를 원한다"며 "푸틴이 추구하는 것은 벨라루스와 같은 러시아에 우호적이고 유연한 정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의 진일보한 '하이브리드(정보전·심리전 등)' 전쟁 전략으로 평가된다. 크리스 쿤스 미국 상원의원은 "푸틴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런 행동을 발전시켰다"며 "입증하기 어려운 '회색 전쟁(gray-scale warfare)'을 통해 세밀하게 조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실었다. FT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러시아의 군사 계획이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일련의 과정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행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나티아 세스쿠리아 영국 왕립국방연구소 연구원은 "심리전 전략으로 러시아는 젤렌스키를 무너뜨려 그가 양보에 서명하도록 강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푸틴 대통령이 2008년 조지아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때도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가다가 멈춰야 할 정확한 시점에 멈추는 전략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지만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은 그때와는 좀 다르다"고 말했다. 또 조지아·크림반도에 비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규모가 달라 출구 전략을 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내에 강경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전면전 카드도 배제할 수 없다. NYT에 따르면 빅토로 졸로토프 러시아 방위군 사령관은 최근 열린 러시아 국가안보회의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이 없다. 미국과 국경이 있다"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에 대한 분리 독립을 승인한 것도 국제법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한 나라의 영토변경은 국민투표에 따라 이뤄지는 것인데, 분리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선언은 국내법 절차에 맞지 않다"며 "이런 점 때문에 국제법으로도 잘못됐다. 러시아가 인정한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인정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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