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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리그 홍일점 최정과 최연장자 이창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최정 9단(左), 이창호 9단(右)

최정 9단(左), 이창호 9단(右)

전반기 KB바둑리그의 최대 화제는 박영훈(수려한 합천)의 8전 8승과 설현준(바둑메카 의정부)의 7승 1패였다. 박영훈은 국수산맥 우승에 이어 쾌조의 상승세를 이어갔고 ‘괴물’로 통하는 설현준은 박정환, 변상일 등 상대팀 1지명 5명을 줄줄이 눌러 새로운 강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설현준의 랭킹은 23위에서 16위, 11위가 되더니 드디어 10위가 됐다.

전반기 팀 성적은 ‘포스코케미칼’이 1위, 그 뒤를 ‘바둑메카 의정부’와 ‘수려한 합천’이 바짝 쫓고 있다. 그러나 후반기에 와서 많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 주말 3라운드에서 변상일의 포스코케미칼은 신진서의 셀트리온에 기막힌 패배를 당했다. 2대2 상황에서 최종 5국. AI 승률은 99대1로 최철한(포스코케미칼)의 절대우세. 한데 여기서 그만 시간패를 당하며 셀트리온에 승리를 헌납한 것이다. 지난 시즌 우승팀이지만 힘을 못 피던셀트리온에게 이 행운은 어떤 작용을 할까.

KB바둑리그는 프로기사에겐 출세의 무대이기도 하고 쇠락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도 많이 받지만 2부와 1부가 교류하며 나름 용광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기면 300만원, 지면 60만원을 받는 대국료도 은근한 자극제다.

이런 바둑리그에서 언제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끄는 두 인물이 있다. 한명은 바둑리그 유일한 여성인 최정(컴투스타이젬). 다른 한명은 불세출의 천재였고 이젠 ‘전설’로 불리는 바둑리그 최연장자(47세) 이창호(YOUWHO).

최정은 한·중·일을 통틀어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 겨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강한 전투력으로 중반을 압도하는 스타일도 멋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언덕은 높고 험했다. 다 올라간 듯싶다가도 주르륵 미끄러지곤 했다. 우선 대국이 너무 많았다. 바둑TV를 틀면 최정이 나왔다. 주위의 기대, 찬사가 지친 두 어깨를 눌렀다. 슬럼프에 빠져 두 개의 타이틀전에서 오유진에게 패배해 우승컵을 내줬다. 바둑리그서도 3연패로 출발했다. 최정 왕국도 저무는가 싶었다. 그러나 최정은 다시 살아나 전반기 3승4패, 후반기 2승, 도합 5승 4패를 거두고 있다. 특히 후반기 2승은 미소를 짓게 한다. 랭킹 7위의 신민준(한국물가정보)과 기세등등 설현준을 꺾었기 때문이다. 최정에겐 항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짐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고 추격자는 많다. 최정을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른다. 바둑나라의 앨리스.

이창호는 범 같은 젊은이들 속에서 분투 중이다. AI로 무장한 후배들의 파워 앞에서 ‘노련’이나 ‘깨달음’은 파도처럼 부서진다. 무엇보다 후반 형세판단이 힘들어 역전을 잘 당한다. 형세판단은 앞날을 예측하여 그걸 계산하는 것이다. 계산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이창호가 계산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은 비감하다. 그래도 전·후반기 합해 5승 6패. 특히 지난 주말엔 무려 4시간 반의 격전 끝에 반집을 이겨 팀의 3대2 승리를 이끌었다. TV 속의 이창호는 길고 긴 초읽기 속에서 마지막 1초도 아끼며 사력을 다했다. 신산(神算)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이창호가 드디어 AI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맥심배 16강전에서는 생애 두 번째로 ‘삼삼’을 파고들며 승리했다. 2019년 첫 시도 후 3년 만이다. 상대가 화점을 두면 걸치지 않고 곧장 그 속으로 파고드는 이 수법은 AI와 대면했을 때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다. 두터움의 대명사인 이창호는 이 대목에서 더더욱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 이창호도 드디어 ‘삼삼파기’를 인정한 듯 보인다. AI의 손을 잡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불세출의 천재와 AI의 만남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혹 상상하지 못할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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