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녀 부동산 사줄려고 해외 가짜 회사까지 만든 창업주

중앙일보

입력

국내 유수 식품기업의 창업주 2세인 A씨. 자녀가 거주하는 해외 지역에 사업 기능이 전혀 없는 명목상의 현지 법인을 만들었다. 이후 A씨는 본사와 해당 법인의 내부 거래를 통해 회사 자금을 빼돌린 뒤 이를 가지고 다수의 현지 부동산을 사 거액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이렇게 번 돈은 비밀계좌에서 따로 관리하며 A씨 자녀의 해외 거주비와 현지 고가 아파트 구매에 몰래 썼다.

현지 법인을 사주 지갑처럼 써 

22일 김동일 국세청 조사국장이 '사주 지배 현지법인을 이용한 부자 탈세 등 조사착수'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국세청

22일 김동일 국세청 조사국장이 '사주 지배 현지법인을 이용한 부자 탈세 등 조사착수'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국세청

22일 국세청은 가짜 현지 법인 등을 활용해 역외 탈세를 저지른 혐의자 44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 대상은 ▶가짜 현지 법인 통한 부자 탈세(21명) ▶고정 사업장 은폐 통한 탈세(13명) ▶불공정 자본거래를 이용한 자금 유출(10명) 크게 3가지 유형이다.

특히 현지 법인을 활용한 탈세는 일반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국제 거래를 통해 세금을 빼돌린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금수저 탈세’로 불린다. 국내보다 해외가 법인 자금 감시가 덜 한 점을 악용했다. 굴을 파서 물건을 빼돌리듯, 현지 법인을 사주의 역외 비밀 지갑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탈세 유형을 ‘터널링(tunneling)’이라고 한다.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국내에서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식음료 기업의 사주 B씨도 현지 법인으로 자녀 사업 자금을 지원해 조사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B씨는 해외에 사실상 가짜 법인을 세워 설립·운영비 명목으로 본사 자금을 보낸 뒤, 정작 이 돈을 현지에서 사업을 하는 B씨 아들이 쓰게 했다. B씨 아들은 아버지 회삿돈을 사업 자금으로 쓴 뒤 남은 돈으로 현지 고가 주택까지 샀다. 국세청은 이 과정에서 B씨가 증여세 등을 누락했다고 보고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고정사업장 숨긴 다국적 기업도 적발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정사업장을 은폐하는 사례도 다수 적발했다. 현행 세법상 비거주자·외국 법인을 과세할 때는 고정사업장이 있는지에 따라 과세 범위와 방법이 다르다. 고정사업장이 있으면 사업장 관련 모든 소득을 합산해 다른 국내 법인 같이 소재지국의 법인세를 신고해야 한다. 고정사업장이 없으면 법인세 신고 의무 없이 원천소득에 대한 원천징수만으로 세금 납부를 끝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다국적 기업은 현지 고정사업장을 은폐하는 수법으로 법인세 등을 회피해 문제가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런 탈세 사례를 막고자 최근 BEPS(Base Erosion Profit Shifting) 프로젝트를 통해 고정사업장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강화를 추진했고, 이를 바탕으로 OECD 모델조세조약(Model Tax Convention)을 개정했다. 또 G20(세계 주요 20개국)을 중심으로 일명 구글세라고 불리는 디지털세 도입 논의도 본격 진행하고 있다.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해외에 본사가 있는 글로벌 장비업체 C사도 형식적으로는 국내 고정사업장 없이 고객사와 장비 등을 직접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자회사는 고정사업장이 아니라 단순 판매 지원 용역만 제공하는 회사로 거래 구조를 짰다. 이를 바탕으로 C사의 국내 자회사는 단순 용역 관련 세금만 납부하고 대부분의 소득은 해외로 이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C사 임원이 자회사로 직접 파견가 고객관리·판매 등 중요한 역할을 모두 수행해 사실상 고정사업장으로 활용했다.

끼워넣기 법인으로 조사 회피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해외 역외탈세 세무 조사 사례. 국세청

불공정 자본 거래를 통한 탈세에 대해서도 국세청이 칼을 빼 들었다. 반도체 집적회로 등을 설계·제작하는 기업인 D사는 중국 현지에 별도 법인을 설립했다. 하지만 향후 세무 조사 등을 피하기 위해 조세 회피처에 속칭 ‘끼워 넣기 법인’을 하나 더 만들어 중국 법인을 간접 지배하는 복잡한 투자 구조를 짰다. 이후 중국 현지 법인 지분 매각을 진행하면서 청산한 것처럼 위장해 모 회사 투자액을 전액 손실처리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 3자에게 지분을 양도한 뒤 번 돈을 사주 역외 계좌에 입금해 관리했다.

김동일 국세청 조사국장은 “2019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외 탈세 혐의자 418명에 대해 세무조사를 해 총 1조6500억원 세금을 추징했다”면서 “디지털세 논의 등 다국적 기업 조세 회피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탈루혐의 확인 시에는 엄정한 세무조사 실시 등 과세주권 행사 차원에서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