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영준 논설위원
“문제는 경제야, 바보 같으니…”란 빌 클린턴의 말이 아니더라도 선거운동에선 먹고사는 문제를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20대 대선에선 외교안보 분야에서 불꽃이 튀고 있다는 게 의외라면 의외다. 다른 국내 이슈, 가령 100만 가구 단위의 공급 경쟁전에 나선 부동산 정책이나 코로나 방역과 경기 대책, 심지어 TV토론 도중 얼떨결에 4자 합의를 본 연금 개혁 등의 공약은 여야가 서로 닮아가는 면이 보인다. 진보, 보수를 떠나 합리적 해법을 찾는 것이 표심을 얻는 길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건 외교안보 분야다.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호주머니 사정보다 국가 안보와 미래를 더 걱정하기 때문일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영 간 간극 심각한 외교정책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
차기 대통령이 새겨야 할 금언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큰 정부 vs 작은 정부’나 ‘성장 vs 분배’ 등의 기준보다 ‘교류협력 vs 비핵화’나 ‘포용 vs 압박’ 등 대북정책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더 유력한 잣대로 통한다. 그러니 내 편 네 편 가르고 줄세우기에 경제보다 외교안보가 안성맞춤이다. 윤석열 후보가 사드 추가 배치와 선제타격론을 거론한 것만큼 진보 진영에 좋은 먹잇감은 없다. 그 내용이 온당하냐 아니냐는 뒷전이고 ‘평화 vs 호전(好戰)’의 이분법 프레임만 춤을 춘다. 마찬가지로 종전선언, 제재 완화 등 문재인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이재명 후보의 입장이나 “흉악한 사드” 발언은 보수의 먹잇감이다. 문제는 다양한 변수가 복잡하게 얽힌 외교안보 현안들은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 전략이나 일도양단의 갈라치기로 국론을 정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 걱정은 선거 후다. ‘평화 포퓰리즘’이나 ‘안보 포퓰리즘’으로 얻은 표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내치(內治)는 처음 길을 잘못 들어도 대통령이 고집만 접는다면 얼마든지 보완책을 세우고 궤도 수정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교안보는 상대방이 있어 수정이 쉽지 않다. 임기 내에 결말을 보겠다는 단기 승부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대단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정파를 뛰어넘는 초당(超黨)적 협치다. 초당적 지지, 바꿔 말해 국민적 합의가 없는 외교정책은 상대방에 굳건한 믿음을 주기 어렵다. 이와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는 것이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5년 후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정책을 믿어 달라고 외국 정부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미 공화당은 1947년 민주당 정부의 외교에 협력하면서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외교를 정치화·진영화하는 오류를 반복했다. 대북정책의 방향은 정권의 향배에 따라 180도 급선회했다. 그뿐인가.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가 합의할 때나, 문재인 정부가 뒤집을 때나 초당적 지지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국론이 반쪽으로 나뉜 사드 배치나 그 이후의 3불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선택이라도 초당적 합의에 바탕한 결론이었다면 이후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의 파당(派黨)외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국회에서 발표했다. 3당 합당 전 소수 여당(민정당) 시절의 대통령에게 여야 의원은 기립박수로 힘을 실어 주었다. 재야 운동권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건 여당이 기존 입장만 고집하지 않고 폭넓게 의견을 수렴해 만든 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약간의 보완을 거쳐 지금도 살아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이 됐다.
대선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과연 보수 대통령이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발표하거나 진보 대통령이 북한과 중국에 원칙적이고 단호한 입장을 공표해 여야 기립박수를 받는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국내 정치를 국경 밖으로 너무 멀리 내보낸 후과를 치르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