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봉근의 한반도평화워치

강대국에 낀 국가의 비애, 국론분열부터 막아야

중앙일보

입력 2022.02.2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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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크라이나 사태와 한국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 주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무력 충돌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보로네츠시 기차역에 도착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 주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무력 충돌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보로네츠시 기차역에 도착했다. [AFP=연합뉴스]

동유럽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가 한창이다. 미국의 조 바이든,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독일의 올라프 숄츠 등 강대국 지도자들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운명을 놓고 협상 중이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첫째, 강대국의 안보 이익을 위해 중소국이 희생당하는 역사가 또 반복되고 있고, 둘째,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우크라이나가 없기 때문이다. 동북아에서도 유사한 역사가 반복됐고, 한국이 그런 자리에 있었다. 최근 동북아에서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면서, 군사안보·경제통상·과학기술 경쟁의 한복판에 위치한 한국은 또 지정학적 경쟁의 시험에 들었다.

우크라이나는 정권교체 때마다 친러·친서방 오가며 파열음
러시아는 전면 군사행동 압박, 미국·유럽은 군사 개입 주저
남·남갈등 심각한 한국, 미·중 사이 효과적 외교전략 못 펼쳐
한국은 동북아의 ‘퍼펙트 스톰’, 군사·경제력 증강만이 살 길

사실 오늘 한국이 처한 동북아 지정학은 동유럽 못지않게 열악하다. 한국을 둘러싼 정세는 종종 사면초가(四面楚歌)보다 더한 ‘오면초가’, 또는 남북·동북아·세계의 3개 국제 정치 폭풍우가 동시에 몰아치는 ‘퍼펙트 스톰’으로 불린다. 한국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그 압박은 계속 커지고 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지정학적 대치선이 점차 선명해지며, 신냉전의 그림자마저 어른거린다.

“정의는 힘 있는 국가만이 주장할 뿐”

전통적으로 국제 정치는 강대국이 규칙을 정하고, 중소국은 그 처분을 따르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2500년 전 저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멜로스 대화’ 편에서 이런 국제 정치의 속성을 설파했다. 당시 스파르타의 식민 동맹국이었던 멜로스가 적대 강대국인 아테네로부터 침공당하자, 중립을 제안하며 존립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이때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의 입을 빌려 약소국의 운명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강대국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약소국은 당할 것을 당할 뿐이다.” 멜로스가 다시 소국에 대한 대국의 정의(正義)를 거론하자, 아테네는 “정의는 힘이 있는 국가만이 주장할 자격”이 있다며 일축했다.

결국 아테네는 적의 동맹국을 제거하는 안보적 이유뿐 아니라, 강대국으로서 위신과 다른 소국에 본보기를 보인다는 이유로 멜로스를 멸절시켰다. 당시 멜로스는 상전 강대국인 스파르타가 지원해 줄 것을 원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전쟁을 피하고자 멜로스를 외면했다. 여기서 멜로스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강대국 사이에 놓인 수많은 ‘낀 국가’의 비극을 대변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불변하는 강대국 행태를 대변한다. 물론 현대에 멜로스와 같이 주권국가가 침략 전쟁으로 소멸하는 경우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강대국의 억지 앞에서 국제법과 정의의 호소는 여전히 무력하다.

한국·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5대 중추국

오늘 유라시아 대륙의 중소 ‘낀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기시감을 느끼며, 동병상련할 것이다. 근대 들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유라시아 주변부의 북동유럽, 발틱지역, 동·중유럽, 캅카스지역, 중앙아시아, 동남아, 동북아의 중소국들은 지정학적 지진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그랜드 체스보드』(1997)에서 ‘낀 국가’ 중에서도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커서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이 벌어지는 국가를 ‘지정학적 중추국’으로 규정하면서,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유라시아의 5대 중추국에 포함했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여건은 특히 열악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지형적 장애물 없이 평원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적대 진영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전략적 중추 지대로 보았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간절히 원했던 독립주권 국가가 됐지만,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정치 개혁이 지체되고 외교정책도 친러와 친서방을 오가며 혼란에 빠진 결과, 유럽연합(EU)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도 지체됐다.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이용하여 여기에 안보의 ‘전략적 종심(strategic depth)’을 재구축하려고 나섰다. 최선책은 우크라이나를 재점령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의 축소된 국력을 볼 때 불가능하다. 최악은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군사 동맹인 나토에 가입하는 것인데, 이는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금지선이었다. 러시아의 이런 전략은 과거 임진왜란, 구한말, 한국전쟁 시 중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했던 명분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중소국이며,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낀 국가’인 한국은 이 사태에서 어떤 교훈과 반면교사를 얻을 것인가.

첫째, ‘낀 국가’는 자신의 지정학적·역사적 정체성, 국가 역량, 지정학적 환경에 부합하는 대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우크라이나·한국처럼 강대국에 접경한 중소국들은 조그만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위험지대에 살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한순간 잘못된 정세 판단과 외교정책으로 강대국의 침략·점령·분할을 당한 중소국 사례가 차고 넘친다.

소련 45만 병력에 맞선 핀란드 사례

그렇다고 이들에게 옵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소국들은 자신의 형편과 환경에 맞추어 편승·균형·중립·등거리·집단안보·비동맹·초월·지역협력 등 온갖 외교전략을 구사하며 생존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나토 가입 또는 ‘핀란드화’가 주로 거론되는데, 자신의 정체성과 지정학적 환경에 부합하는 생존 전략을 찾아야 한다. 한국도 국제 환경의 변동에 따라 중추국·통상국·분단국 정체성과 중견국 역량에 부합하고 미·중 전략경쟁 시대에 유효한 신외교전략을 찾아야 한다.

둘째, 자강(自强)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자강이란 가용한 국력을 결집하여, 강한 외교·군사적 저항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강대국에 비해 국력이 턱없이 열등한 중소국에 자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사를 돌이켜보면 강대국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은 소국의 명분 있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쳐 번번이 무산됐다. 1939년 겨울전쟁에서 인구 400만 명의 핀란드가 홀로 초강대국 소련의 45만 병력을 격퇴했는데, 4200만 명의 우크라이나가 자강력을 갖춘다면 러시아의 명분 없는 침공을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동북아의 ‘퍼펙트 스톰’을 극복하려면 국력을 결집하고 군사·경제·과학기술적 자강력을 갖춰야 한다.

구한말 강대국 사이에서 무너진 조선

셋째, 국론 합의에 기반을 둔 외교정책의 일관성이 긴요하다. 중소국에서 국론이 결집하면 자신의 영토 내에서 수비의 용이함까지 더해져 체급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반면에 국론이 분열되면 열등한 국력마저 분산되어, 구한말과 같이 강대국의 개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민족성, 친러와 친유럽 성향의 혼재, 민주주의의 저발달로 국론이 분열됐었다. 정권 교체 때마다 친러와 친서방을 오락가락하며 서방 그룹에 참여할 기회도 놓쳤다. 우크라이나 내부가 취약하니 미국과 유럽국도 군사력 지원을 주저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최긴급 과제는 국론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외교정책에서 만연한 남·남 갈등 현상은 우리 외교에 큰 장애 요인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떤 대외 전략도 혼선에 빠지거나, 추진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우크라이나의 안녕과 번영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관여하고 지원해야 한다. 양국은 유라시아 ‘낀 국가’로서 지정학적 운명을 공유하고, 강대국 정치와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외교 원칙도 공유한다. 사실 유라시아는 동일 지정학적 공간이므로 우크라이나 사태는 동북아에도 곧바로 충격을 미친다.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영토 보존은 모든 중소국들의 공통된 가치이자 이익이다. 온존하고 강건한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에서 강대국 경쟁을 완화하고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안보의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은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에 민주화와 산업화 경험을 전수하는 것도 비슷한 처지의 국가로서 한국의 지정학적 임무를 다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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