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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18만부…회사 다니며 쓴 동화책이 어른 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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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긴긴밤』은 어린 펭귄이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진 문학동네]

『긴긴밤』은 어린 펭귄이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진 문학동네]

“쓸 당시에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사치였고, 이렇게 살다 보면 이야기 잘하는 할머니라도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썼으니까요.”

동화  『긴긴밤』의 작가 루리의 말이다. 코뿔소 ‘노든’과 이름 없는 펭귄 등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펼친 이 동화책은 지난해 2월 출간됐다. 어른 독자들의 호평과 함께 1년 만에 18만부 가까이 팔렸다. 루리는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신인이다.  『긴긴밤』으로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실직한 동물과 도둑 이야기를 담은 2020년 첫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로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작가는 서면 인터뷰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주저앉아 울었다”고, “많은 분이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직장인인 그는 “제가 쓴 이야기가 ‘저’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에 가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실명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동화 『긴긴밤』의 작가 루리. [사진 루리]

동화 『긴긴밤』의 작가 루리. [사진 루리]

『긴긴밤』 작가로서, 코뿔소 노든에게 참혹한 비극을 거듭 안겨줬는데.
“노든은 마지막 남은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을 모델로 했다.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존재가 겪을 고통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리라고, 어쩌면  『긴긴밤』의 이야기보다 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2018년 뉴스로 전해진 수단의 죽음이 이야기의 단초가 됐다. 그는 “처음에는 그림책으로 구상하다가, 점점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져 글로 쓰게 됐다”며 “글이 당선된 다음에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했다”고 했다.

노든이 비극과 악몽으로 긴긴밤을 지새우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특히 다른 존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중한 관계를 맺는 모습이 뭉클하다. 그 원동력을 묻자, 작가는 우연히 본 ‘폭탄 연못’ 사진 얘기를 꺼냈다. “베트남 전쟁 중 미군이 270만 톤 넘는 폭탄을 투하했는데, 폭탄이 떨어진 자리가 약 45년 정도 흐른 뒤 모습”을 담은 캄보디아 작가 반디 라티나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먼저, 폭격이라는 엄청난 시련의 이야기가 있었겠죠. 그리고 불모지가 된 구덩이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을지도 몰라요. 덕분에 떠다니던 씨앗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곳을 외롭지만 꿋꿋하게 지켜오다가, 조금씩 조금씩 4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사진 속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 거예요. 폭격이 남긴 웅덩이는 메꿔지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남는 흉터가 되겠죠. 하지만 무언가가 이 웅덩이에서 살아남았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작품 속 화자인 어린 펭귄은 이름이 없는데.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멍멍이 뭉크가 있다. 악몽을 가끔 꾸는데 뭉크랑 똑같이 생긴 멍멍이가 수백 마리 있는 곳에서 뭉크를 찾아 탈출해야 하는 꿈이다. ‘뭉크야!’ 하고 불러도 소용없다. 저만 아는 특징들로 뭉크를 찾는다. 아기 펭귄은 뭉크처럼 사랑받는 존재였고,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어린 펭귄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여럿이다. 그를 돌본 펭귄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까지 모두 수컷인데.
“이야기를 구상할 무렵 아빠가 암 판정을 받으셨다. 마음의 정리를 하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아빠를 보면서, 아버지들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아빠는 씩씩하게 싸워서  『긴긴밤』 시상식까지 참석하셨고, 저 대신 수상 소감도 하셨다. ‘요즘 책값이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앞으로도 사람들한테 국밥 한 그릇 같은 책을 쓰라’고 하셨다.”

질문에는 없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긴긴밤’을 이렇게 전했다. “뭉크가 죽고, 아빠가 아프고, 힘든 일은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그때 든 생각이 ‘일주일 중 30초 정도만 행복하면 살자’라는 생각이었어요. 키우던 강아지가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거나, 동생이 머리를 망쳐서 웃긴 얼굴로 온다거나, 30초 정도 웃음이 터지는 그런 하찮은 순간들이 저를 살게 하더라고요.”

미술이론 전공인데, 그림책에 매료된 계기는.
“그냥 쓰고, 그리고, 사부작거리는 게 너무 좋았다. 학교에서도, 회사에 다니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 속으로 도망을 쳤던 것 같다.”
좋아하거나 영향받은 작품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개들의 섬’, 그리고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도리를 찾아서’를 좋아하고, 여러 번 보면서, 나도 저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업 작가가 될 건지 묻자, “직장생활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힘든 날도 있고 지치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제가 앞으로도 종이에 담아내고 싶은 모습들이라서요. 그런 모습들을 담아, 지금은 ‘파우스트’를 기반으로 한 그림책을 작업 중에 있고,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동화도 구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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