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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선수에 '유통기한' 매겼다…머리채 잡는 악명의 그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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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예바(오른쪽) 선수의 코치, 예테리 투트베리제(왼쪽). 베이징 올림픽을 둘 모두에게 악몽으로 끝났다. 로이터=연합뉴스

발리예바(오른쪽) 선수의 코치, 예테리 투트베리제(왼쪽). 베이징 올림픽을 둘 모두에게 악몽으로 끝났다. 로이터=연합뉴스

2014년 전까지 ‘예테리 투트베리제’라는 이름 여덟 글자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올해 47세인 투트베리제는 그해 소치올림픽에서 개최국 러시아에 피겨 스케이팅 메달을 안긴 일등 공신 중 하나로 꼽혔다. 러시아에 팀 금메달을 안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율리아 리프니츠카야 선수의 코치였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를 크렘린 궁으로 불러 직접 훈장을 달아주고 아래 기념사진을 찍었다.

소치 올림픽 직후 투트베리제에게 훈장을 직접 달아준 푸틴 대통령. 투트베리제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다. [Instagram]

소치 올림픽 직후 투트베리제에게 훈장을 직접 달아준 푸틴 대통령. 투트베리제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다. [Instagram]

소치 다음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도 투트베리제가 키운 알리나 자기토바 선수가 금메달,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제빙상연맹(ISU)은 2020년 그를 ‘올해의 코치’로 선정해 상을 주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0일 폐막한 베이징 올림픽에서 ‘학대의 아이콘’이 됐다. 유망주였으나 도핑 의혹에 휩싸이면서 결국 수차례 넘어지며 4위에 머문 카밀라 발리예바 선수의 코치로서다. 경기 직후 울면서 들어오는 15세 소녀 발리예바에게 그가 “왜 포기했냐”고 다그치는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그가 10대 초반 청소년 유망주들을 약물 및 극단적 식이 제한 등으로 트레이닝 해온 사실도 밝혀졌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정부와 민간 모두 “발리예바는 영웅”이라며 투트베리제를 두둔하는 듯한 분위기다. 메달 숫자와 색상을 국력의 과시로 여기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투트베리제가 발리예바에게 “왜 싸우는 걸 멈췄냐”고 한 것은 경기를 곧 남을 이겨야 하는 싸움으로서만 인식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발리예바 선수가 경기 직후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투트베리제 코치가 아닌 다른 코칭 스탭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AFP=연합뉴스

발리예바 선수가 경기 직후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투트베리제 코치가 아닌 다른 코칭 스탭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AFP=연합뉴스

투트베리제 본인도 빙상 선수였다. 여러 외신을 종합하면 그는 택시 기사였던 아버지와 공무원이었던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스케이터로서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케이팅의 꽃인 피겨 부문에서 탑을 달리진 못했다. 한때 아이스 댄스 선수로 뛰었지만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영국 BBC가 지난 19일(현지시간) 그에 대한 분석기사를 내면서 “선수로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며 “2014년 소치 올림픽 이전까지는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별로 없었을 정도”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결혼은 미국인과 하고 미국에서 거주하며 딸 다이애너를 낳았으나 얼마 안 되어 이혼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에서 스케이팅 코치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곧 러시아로 돌아왔고, ‘삼보 70 클럽’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훈련팀을 꾸렸다. 이때부터 투트베리제 특유의 지옥훈련이 시작됐다. 미국 NBC 방송은 “악명은 높았지만 성과를 분명히 내는 투트베리제의 팀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꿈나무들은 줄을 서 있었다”며 “투트베리제는 어린 선수들을 ‘유통기한이 있는 소모품’이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그가 키워낸 선수들은 상당수가 20대가 되기 전에 은퇴했고, 이는 혹독한 훈련 때문이라는 게 국제 스포츠계의 평가다.

 지도자의 엄격함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투트베리제 코치가 남긴 질문이다. 연합뉴스

지도자의 엄격함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투트베리제 코치가 남긴 질문이다. 연합뉴스

흥미로운 건 지옥의 코치도 그러나 딸만큼은 마음대로 못했다는 점이다. 딸 다이애너 역시 스케이팅 선수이지만 어머니의 코치를 받지는 않았다고 BBC는 전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아이스 댄스 페어 부문에 출전해 14위를 기록했다. 딸은 아버지의 성(姓) 데이비스를 따른다.

스케이팅이나 발레와 같은 분야에서 ‘엄격한 코치’라는 존재는 새롭지 않다. 지도자는 무서워야 한다는 게 스포츠 및 문화예술계의 일종의 불문율이었고, 러시아에선 특히 그러했다. 그럼에도 훈련 중 머리채를 휘어잡거나, 약물 등으로 2차 성징을 막아 기록 향상을 꾀한 투트베리제의 훈련 방식은 정당화되기 어려운 분위기다.

투트베리제 본인은 세간의 평가에 “나는 어린 선수들을 엄격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룬다”고 항변한다. 2018년 한 러시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BBC는 전했다. 그 나름의 사랑의 표현이며 지옥 훈련은 사랑의 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번 발리예바 케이스를 분기점으로 투트베리제의 방식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진화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BBC는 “출전 연령 제한부터, 코칭 방식까지 여러 문제를 (투트베리제는) 던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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