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돈 안 주면 내 손주 죽는다고 울더라고요.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같았죠.”
누군가와 통화하며 불안해하던 80대 할머니를 지나치지 않은 퇴직 경찰관의 ‘직감’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았다. 서울 동대문구 종암초등학교 학교보안관으로 근무하는 박승열(56)씨 이야기다. 박씨는 1986년 순경 공채로 경찰에 입문해 현장을 누비다 지난 12월 노원경찰서 당현지구대에서 경감으로 퇴직했다.
"손주 죽이겠다" 협박…쇼핑백엔 2000만원
지난 15일 오후 1시 30분쯤 종암초등학교 후문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박씨의 눈에 80대 할머니 A씨가 들어왔다. A씨는 전화기를 붙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종암초 후문 앞 일차선 도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박씨에 의하면 후문 앞에 도착한 A씨는 “약속 장소에 왔는데 왜 아무도 없냐”며 전화기에 소리쳤고, 불안감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박씨는 곧장 A씨 옆으로 다가가 통화 내용을 들었다. A씨 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에는 500만원어치 현금 두 뭉치와 1000만원짜리 수표 등 총 2000만원이 들어있었다. 박씨는 평소 알고 있던 ‘조부모 협박 보이스피싱’ 사례와 똑같음을 확신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A씨에게 “보이스피싱 범죄인 것 같다”며 설득했지만, A씨는 손주 걱정에 전화기를 쉽게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거듭 설득한 박씨는 A씨의 휴대전화를 받아 보이스피싱 일당과 직접 통화했다. 박씨는 "손주를 사칭하는 피싱범도 전화가 오더라"며 "‘왜 우리 할머니 전화를 당신이 받냐’고 소리 지르길래 주소·고향 같은 인적사항을 바로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36년간 현장을 누비던 전직 경찰관의 기지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곧장 112에 신고한 박씨는 15분 정도 A씨를 보호하다 현장에 출동한 제기파출소 관계자에 할머니를 인계했다. 할머니가 들고 온 2000만원 상당의 현금과 수표도 피해 없이 그대로였다.
손주 모습 보고서야 ‘안심’
서울 동대문경찰서 제기파출소 관계자는 “경찰 확인 결과 손자의 안전을 빌미로 협박한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이었다”며 “학교보안관이 80대 할머니가 서성이는 걸 놓치지 않고 발견해 신고한 덕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불안해하는 할머니 대신 손자 B씨와 통화하고 B씨를 파출소로 불러 할머니를 모시고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며 “할머니가 손자를 직접 보고 나니 안심이 됐는지 고맙다고 하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