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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은 통일 비전 밝히는 자리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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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수 전 주독일 대사·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이경수 전 주독일 대사·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사회 일각에서 통일 지향을 부인하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어 우려스럽다. 국제 사회에 북한의 도발과 국제 규범 위반을 올바로 제기하기 위해, 또는 한반도 평화 공존을 위해 남북 관계의 본질을 정식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학계 인사는 주권·이념·체제에 대한 상호 인정이 항구 평화의 길이라고 한다. “통일을 지향하기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언급하기도 하고, 자신을 “남쪽 대통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실과 타협하여 장기 목표를 상실한 주장들이다.

통일은 한반도의 안보와 분단에 따른 고통, 북한 인권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이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헬무트 콜은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에서 독일 통일의 순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기본법(헌법)이 부여한 통일 목표에 시종일관 충실했던 동료들을 떠올렸다고 술회했다. 서독도 전승국의 독일 통일 결정 권한, 동독의 ‘2민족2국가론’, 현실 안주론, 동독에 온정적인 정치 세력 등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했으나, 좌·우파 정부를 넘나들면서도 지켜낸 통일 지향이 통일·외교 정책에 체화돼 통일 실현의 원천이 됐다.

헌법에 나오는 대통령의 통일 의무
후보들은 통일 지향 정치력 보여야

서독은 기본법 전문에 ‘독일 국민의 통일과 자유 완성 책임’을 명제화함으로써 동독의 국가성을 인정하거나 통일 지향을 부인하는 행위를 제어하고 정치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이룬 빌리 브란트는 동독을 실체로 인정하면서도 분단의 공식화 여지를 차단해 미래의 통일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1970년 소련과의 모스크바 조약 협상 시 통일 포기로 해석될 수 있는 유럽의 현상 유지와 국경선 확정 요구에 대해 ‘에곤 바 서한’을 통해 조약이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72년 동서독 기본조약 협상 시에도 기본조약이 서독 정부의 목표인 통일에 배치되지 않으며 동서독 관계가 통일까지의 잠정적 특수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서한 첨부를 요구해 관철했다.

1973년에는 헌법재판소가 기본조약이 기본법의 통일 명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과 함께 추진 과정에서 통일 추구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여 국내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여정 끝에 콜 총리는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가 통일의 기회를 열어 주었을 때 냉전 동안 감춰왔던 통일 달성이 “여전히 서독 정부의 정치적 목표”임을 선언할 수 있었으며, 이듬해 통일로 이어졌다.

우리 헌법도 전문에 이어 4조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했다. 66조 3항은 특별히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함으로써 국가와 대통령의 통일 지향 책무를 명제화하고 있다.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남북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로 규정했다. 전년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현실에 입각하되 남북한이 국내외적으로 항구적 분단 상태로 수용될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며, 역대 정부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분단 장기화와 민족 동질성 약화로 북한을 ‘어느 이웃’으로 보는 ‘2국가 병존’ 의식이 굳어지고 헌법의 명제인 통일 지향까지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공론화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에 기반을 둔 현실적 정책 수립과 외교 태세 정비에 정부가 다시 나설 때다.

국가 어젠다와 비전을 제시하는 대선이 진행 중이다. 국민에게 통일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대통령 후보들은 당파를 초월해 긴 호흡으로 한반도 미래상을 제시하고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정치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을 지도자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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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전 주독일 대사·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