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가 건물 점거해도…불법 여부조차 모르는 희한한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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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 노조원들이 20일 서울 중구 CJ대한통운에서 점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뉴스1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 노조원들이 20일 서울 중구 CJ대한통운에서 점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뉴스1

택배노조의 CJ대한통운 본사 점거 농성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택배 운송 거부에 들어간 이후 20일로 55일째다. 회사와 노조는 타협 없는 대치 국면을 이어가고 있고, 정부는 개입을 꺼리고 있다.

CJ대한통운 측은 노조가 본사를 물리력으로 점거하자마자 공동건조물 침입과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노조를 고소했다. 노조는 사회적 합의 이행, 택배노조 사무실 제공 등을 놓고 사측과의 교섭을 요구했다. 유성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본부장은 "21일까지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특단의 투쟁으로 맞서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택배노조와 근로계약을 한 당사자는 대리점으로, 협상 대상이 아니다"며 교섭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에선 택배기사끼리 노노 갈등 조짐도 보인다. CJ대한통운 비노조 택배기사들은 "노조가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하면서 대화를 하자고 한다"며 "떼 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며 복귀를 촉구했다. 비노조택배기사연합을 이끌고 있는 김슬기 대표는 17일 "택배노조는 영세사업자인 대리점주에게 자녀 학자금을 전액 지급하라고 하고, 연차를 지급하거나 연차 대신 1일당 20만 원을 달라고 한다"며 "대리점주에게 택배노조만의 사무실과 회의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CJ대한통운과의 대치가 길어지자 장외투쟁을 병행하면서 김부겸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 개입과 압박을 통한 해결에 기대는 모습이다.

19일에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해 "CJ 자본의 편을 든다"고 규탄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는 "더 들여다봐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집회에는 이후보 지지 선언을 한 윤미향 의원과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참석했다.

불법인가, 아닌가…정부 입장 안 내놔 추정할 뿐

사태가 악화하고 있지만 정부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고용노동부는 택배노조의 CJ대한통운 본사 점거 농성과 관련, 공개적으로 합·불법을 공표한 적이 없다. 법 위반 여부를 기업이나 국민이 추정해야 하는 희한한 상황이다.

다만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고용부는 이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과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가 현대제철 당진공장 통제센터를 점거한 데 대한 질의에 대해서다. 당시 안경덕 고용부 장관은 "점거는 불법"이라며 공권력 투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CJ대한통운 점거 사태에 대해서도 고용부 내부의 의견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고용부 관계자는 "정상적 쟁의행위가 아니다. 타인의 건물을 무단 침입한 불법행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부의 합·불법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은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난해 내놓은 판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중노위는 당시 "택배노조의 협상 당사자는 CJ대한통운으로, 단체교섭 거부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했다. 앞서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노조의 교섭 당사자는 대리점"이라는 판정을 뒤집었다. 이와관련 고용부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기존 판례와 행정해석은 단체교섭 상대방인 사용자에 대해 근로계약 관계를 요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조합원과 근로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사업주(택배에선 대리점주)가 단체교섭 당사자라는 것이다. CJ대한통운에 대한 중노위의 부당노동행위 판정을 부인한 셈이다. 결국 국가기관끼리 엇갈린 해석을 하면서 혼란은 가속화하고 있다.

고용부는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노조에 대한 설득작업을 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학 교수는 "명확한 입장 표명없이 정부가 나서 당장 급한 불만 끄려하면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CJ대한통운의 고소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지만 공권력 동원에는 선을 그으며 사실상 무대응으로 방향을 잡았다. 최관호 서울경찰청장은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기본적으로 CJ문제는 노사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며 "대화로 조기 해결토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모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치안 문제인데, 노사관계로 떠넘기는 것 자체가 법치와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나마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의 움직임은 전혀 안 보인다.

과거에는 어땠나…현 정부에선 노조에 치안권?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았다. 2010년 KEC노조는 노조 간부의 근로시간 면제제도(타임오프)를 거부하고 유급 전임자 유지를 요구하며 공장을 10일간 점거했다. 고용부는 "명백한 불법'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경찰이 공권력을 동원해 공장 가동을 정상화했다.

2016년에는 알바노조 소속 조합원 70여 명이 근로감독관의 부실한 조사에 항의한다며 고용부 장관의 면담을 요구하며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민원실을 점거했다. 경찰은 1시간 만에 민원실 점거 농성을 해결하고, 관련자를 연행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달라졌다. 지난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가 원청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당진공장 통제센터를 점거했다. 당시 경찰은 "노사 자율교섭"을 얘기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고용부도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다 국정감사에서 "불법" 의견을 피력하는 데 그쳤다. CJ대한통운 점거 사태와 같은 방식이다. 점거 사태는 사측이 양보할 때까지 50여 일(8월 23~10월 13일)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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