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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 담담했던 고다이라, 아름다운 눈물 "내 약점 마주했다" [도쿄B화]

중앙일보

입력

도쿄B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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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도쿄B화]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이번 베이징 겨울올림픽에도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지만, 이 장면에선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13일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에서 평창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小平奈緒·35) 선수가 17위라는 아쉬운 성적을 냈던 순간이죠. KBS 해설자석에 있던 친구 이상화 선수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합니다. 경기를 끝낸 고다이라는 공동취재구역에서 "Where is 상화(상화 어디 있어요)?"라고 이상화를 찾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말합니다. "상화,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요. 저는 오늘 안 좋았어요."

지난 13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 출전한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고다이라는 38초09의 기록을 보여주며 전체 17위를 기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3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 출전한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고다이라는 38초09의 기록을 보여주며 전체 17위를 기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장면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이들의 우정이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겉치레가 아닌 '진짜'라는 것이 고다이라 선수의 "저는 오늘 안 좋았어요"라는 투정 섞인 말 속에 담겨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응원해 줘서 고마워, 근데 그만큼 잘하지 못했어. 미안해'라는 속상한 마음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널리 알려진 건 지난 평창 겨울올림픽이었습니다. 당시 여자 500m에서 1등을 한 고다이라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상화에게 다가가 안아주며 위로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둘은 선수 생활 초반부터 국적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이였습니다. 이상화 선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스피드스케이트는 고독한 경기라 선수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해요. 그래서 너 자신과 최선을 다해 마주하라고 격려했죠. 고다이라는 저의 라이벌이자 원동력, 그리고 영원한 친구예요."

답을 찾아가는 '빙상 위의 구도자'

고다이라는 일본에서 조금 늦게 빛을 본 스타입니다. 나가노(長野)현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팀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던 코치가 있는 국립대인 신슈(信州)대에 시험을 쳐 입학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동안 소속팀이 정해지지 않다가 아이자와(相澤)병원의 스포츠장애 예방센터 직원으로 '취업'해 운동을 이어갑니다.

20대까지는 세계 7~8위 정도로 세 살 어린 나이에 세계 톱이 된 이상화의 등을 바라보며 달리는 선수였습니다. 그러다 2014년 소치올림픽이 끝난 후 떠난 네덜란드에서 크게 성장해 돌아옵니다. 서른하나에 출전한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여자 500m에서 금메달, 1000m 은메달로 인생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었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 나오(왼쪽)와 은메달을 딴 이상화. 연합뉴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 나오(왼쪽)와 은메달을 딴 이상화. 연합뉴스

고다이라에게선 자신와의 끝없는 싸움을 통해 나름의 경지에 이른 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본에선 그를 '빙상 위의 시인', '빙상 위의 구도자'라고까지 부르기도 합니다. 평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아사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면?"이란 질문에 "구도자, 열정, 진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금메달은 내 자신이 어떻게 싸워왔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물론 영광스럽다. 하지만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후 이상화는 은퇴했지만, 고다이라는 다시 한번 올림픽 도전에 나섭니다. 하지만 고관절에 이상이 생기면서 3년 가까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죠. 힘들었던 그 시간에도 이상화가 보내준 응원 메시지에 큰 힘을 얻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7일, 아마도 고다이라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가 될 여자 1000m 경기에 팬들은 가슴을 졸였습니다. 서른 다섯살, 빙상 위의 고다이라 선수는 조금 힘들어 보였고 결국 10위의 성적으로 경기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링크 위에선 담담한 표정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후배 다카기 미호(高木美帆·27)를 축하했습니다.

13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를 마친 고다이라 나오. 로이터=연합뉴스

13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를 마친 고다이라 나오. 로이터=연합뉴스

경기가 끝난 후 고다이라는 눈물을 보이며 한 달 전쯤 눈길에서 넘어져 오른쪽 발목에 염좌가 생겼다면서 "그동안 참아온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도 보상받고 싶었다. 기적을 바라고 있던 부분도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나의 약점과 확실히 정면에서 마주해온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인 같은 한마디를 남깁니다. "살아있는 한, 살아있음에 마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남기기 못한 올림픽이지만, 앞으로도 산들바람처럼 '아 기분 좋은 바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떠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 도전하고,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며, 그럼에도 노력한 자신을 격려하면서 떠나는 모습도 아름답다는 것을 고다이라를 통해 배웁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이러한 순간을 맞았을 많은 선수들을 응원합니다. 올림픽은 끝나도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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