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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넘나드는 마블 영웅들, 멀티버스 세계관 반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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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호 22면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올해 5월 개봉예정인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2’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올해 5월 개봉예정인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2’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이 무슨 현상인가? 코로나 이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뿐만 아니라 마블의 애니메이션 ‘왓 이프…?’, 드라마 시리즈 ‘로키’, 그리고 올해 개봉 예정인 ‘닥터 스트레인지2’ 등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멀티버스’를 외치고 있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는 코믹스·애니메이션·영화 등 마블 스토리와 관련된 각종 판권을 사들여 캐릭터들이 상당히 모아지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캐릭터들이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밖으로 뛰쳐나와 동일한 시공간에 공존하였다가 또다시 다른 타임라인들을 넘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세계관이 ‘멀티버스’다. 그도 그럴 것이 마블 시리즈에 축적된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웅 캐릭터들이 각기 다른 우주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OTT(Over The Top·전파나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콘텐트를 제공하는 서비스) 콘텐트는 생산 방식이 기존과는 상당히 다르다. 단순한 허구의 창작이 과거였다면, 현재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기 위한 특정 세계관에 근거한다. 다른 소설이나 장르에 나타나는 캐릭터 데이터를 그물망처럼 엮되, 모든 서사를 꿰어낼 수 있는 세계관이 밑바탕이 된다. 최근의 데이터들은 그 세계관으로 질 들뢰즈 식의 ‘차이 나는 반복’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MCU가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제시한 ‘멀티버스’란 무엇일까? ‘멀티’라는 말은 라틴어 ‘물투스(multus)’에서 온 말로 ‘많은’이라는 뜻이다. ‘버스’는 ‘universe’에서 가져왔는데, 라틴어 ‘베르수스(versus)’는 ‘변화됨’을 뜻한다. 결국 ‘많은 것들로 변화됨’이 멀티버스의 의미다. 타임라인을 넘나들며 마블의 영웅들이 도착하는 각각의 세계가 멀티버스, 즉 또 다른 모습을 한 다중우주다.

그런데 멀티버스는 단지 SF적인 상상만이 아니다. 과학적 다중우주론의 양대 산맥인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론’과 ‘양자적 다중우주론’, 그리고 그 뿌리가 되었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를 대표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인플레이션 다중우주론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한 장면. [사진 각 배급사]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한 장면. [사진 각 배급사]

멀티버스는 빅뱅이론 안에 있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아이디어였다. 우주 탄생의 원인으로 인정받는 빅뱅이론에 따르면,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는 초기에 상당히 작았다. 하지만 모종의 물질과 에너지 전부가 너무 작은 것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밀도로 포개져 있었다. 이후 원시 폭발과 함께 고온이었다가 갑작스러운 팽창으로 곧 식게 되었다. 이때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가 발생했다.

이론대로라면 이 배경복사의 온도는 어느 방향으로나 같아야만 했다. 하지만 WMAP우주망원경 위성으로 실제 관측한 결과, 온도가 균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영역이 발견됐다. 심지어 상당히 넓게 분포돼 있었는데, 해상도가 세 배나 더 높은 플랑크우주망원경 위성으로 다시 관측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영역은 온도가 낮기 때문에 우주배경복사의 냉점(Cold Spot)이라 불린다.

냉점은 2021년 중력 렌즈 효과를 활용한 암흑에너지탐사(DES)에 의해 그 구성성분의 밀도가 측정되었다. 우주의 구성성분이란, 천체물리학자들에 따르면 물질·암흑물질·암흑에너지를 말한다. 우주는 대략 물질이 4%, 암흑물질이 22%, 암흑에너지가 74%를 차지하고 있는데, 냉점은 주변 영역보다 물질의 밀도가 약 20% 더 낮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냉점은 그 밀도가 낮기 때문에 ‘텅 비어 있음’이라는 뜻의 ‘보이드’라 칭하는데 온도가 낮고 밀도가 낮은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부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가설 단계의 흥미로운 해법으로 멀티버스가 제기됐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그 바깥의 또 다른 우주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흔적이 냉점일 수 있다는 가설이다. 냉점이 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우주가 서로 맞부딪친 증거이며, 이때 새로운 입자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생성되어 양자 수준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아직까지 폭넓은 호응을 얻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마블시리즈를 비롯한 많은 미디어에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양자적 다중우주론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양자적 다중우주론은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인 ‘다세계 해석’에서 이끌어낸 우주 모형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인터렉티브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를 살펴보자.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영화의 결말이 바뀌는데, 가능한 ‘다양한 결말’(멀티엔딩)을 미리 만들어놓고 시청자가 적극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끝 장면에서 시청자는 주인공 스테판처럼 다섯 살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 스크린에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탈 것인가, 말 것인가?” 질문이 나타나고, 시청자는 10초 안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다르게 끝난다.

하나의 가능성이 취해지는 순간 하나의 세계만을 확인할 수 있고, 다른 가능한 세계는 일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하나를 선택하기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는 것과 타지 않을 두 가지 가능성은 공존한다. 공존하는 가능성들이 바로 양자적 다중우주론의 모티브가 된다. 여기서 양자역학은 아직 특정한 경우를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가능한 모든 사건의 결과가 각자의 세계에 실재한다’는 ‘다세계 해석’을 한다.

양자역학에서 ‘가능한 모든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고전역학과 비교할 수 있다. 고전역학에서는 지구나 달과 같이 큰 천체들과 바위나 공과 같은 물체의 운동은 그 결과가 항상 동일했다. 법칙대로 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자나 원자, 그리고 소립자 등의 미시세계로 접어들면 고전역학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동일한 입자를 대상으로 동일한 실험을 해봤자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에는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일까? 양자역학은 동일한 관측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확률’인데, 예를 들어 하나의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전자는 관측될 때마다 위치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전체적인 ‘통계분포’는 거의 일정하다. 여기서 ‘통계분포’란 전자가 특정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확률’을 의미한다.

닐스 보어를 비롯한 코펜하겐학파 물리학자들은 파동과 입자로 있는 것을 관측하면 그 즉시 ‘확률파동이 붕괴되어 입자로 한 지점에 집중된다’고 주장했다. 즉 파동과 입자로 동시에 있던 것이 관측을 거치면 입자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치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에서 시청자가 선택하면 그에 따른 결과만 나타나듯 관측이 이뤄지면 입자는 하나의 명확한 지점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관측 행위가 있기 전에는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중첩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관측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확률파동이 우리에게 친숙한 ‘유일한 실체’로 변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던 휴 에버렛은 이 질문을 파고들었고,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에버렛의 이론에 의하면,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건은 분리된 세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이 낳은 다중세계이며, 양자적 다중우주론의 단초가 되었다.

우주들은 확률적으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있을 수 있으며, 무한시간이 존재할 경우 각 확률에 해당하는 우주가 무한에 가깝게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단 하나의 세계만을 경험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이 세계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의 철학’

멀티버스는 아직 가설로 남아 지지파와 반대파로 양분돼 있지만, 그 진위를 떠나 마블 시리즈를 비롯한 영화·드라마·게임·웹툰·뮤직비디오·문학 등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들은 멀티버스 덕에 저마다의 영웅들과 캐릭터들이 살고 있다는 다양한 가능성의 우주를 설정했다. 지금 가상의 메타버스 속 가능세계도 어쩌면 멀티버스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과학 발전의 산물임이 분명하지만, 이미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의 철학’이 그 아이디어를 품고 있었다. 그는 신이 자신의 지성 속에 무한히 많은 가능세계를 구성하고 그중 ‘가능한 최선 세계’를 선택해 현실세계로 가져왔다고 본다. 이것을 ‘옵티미제이션(최적화)’이라고 했다.

지금은 주로 증권이나 기업인수 등에서 전체를 한꺼번에 계산해서 득실을 따지는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이 단어의 뿌리어는 라틴어 ‘옵티무스(optimus)’로 ‘가장 좋은’을 뜻한다. 라이프니츠의 ‘최적화’는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문장에서 가져온 개념이었다. 수많은 ‘가능세계’ 중에서 ‘최적’ ‘단순’ ‘조화’라는 원리가 작용해 선택된 가장 좋은 세계가 물리적 실재, 즉 필연으로 존재했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낙천주의라고 하는 ‘옵티미즘’이 바로 이 ‘최적화’, 즉 옵티미제이션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누가 낙천가로 살 수 있을까? 다중우주 가운데 우리 우주가 최적화된 우주라고 믿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최적화된 것이 어디 우주뿐이겠는가! 인간을 하나의 가능한 최선의 ‘모나드’로 본 라이프니츠뿐만 아니라 하나의 ‘소우주’라고 믿었던 비트루비우스, 그리고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혜로 볼 때, 우리도 하나의 우주임에 틀림없다. 그 중 생명을 부여받고 호흡하도록 선택된 ‘나’라는 우주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우주일 것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에서

김동훈 인문학자. 서양고전학자·철학자.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희랍과 로마문학 및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희랍어와 라틴어 및 고전과 인문학을 가르친다. 인문학의 서사를 담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퓨라파케’ 대표. 『인공지능과 흙』 『브랜드 인문학』  『별별명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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