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중기 공장장 시절 춤으로 인기 끌어…노사분규도 해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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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강신영의 쉘 위 댄스(75·끝)

나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겉보기에는 내가 춤을 추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춤을 좋아하기는 했다. 빡빡머리 고등학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 갔을 때 여관 마당에서 모여 여흥의 시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휴대용 야외전축이란 게 있었다.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용수철 튀듯 뛰어나가 몸을 흔들었는데 곧바로 학우들이 열광했다. 그날 밤 열화 같은 초대에 방마다 돌아다니며 춤 특강을 했다. 장판은 뜨겁고 마구 발바닥을 비비다 보니 발바닥, 발가락에 물집 잡혀 다음날 토함산 일출 보는 일정에 못 간 학우들이 많았다. 그전까지는 타교 출신이라고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 일로 학내에서 유명해졌다. 졸업 때까지 ‘춤선생’으로 불렸다.

춤을 일찍 배운 것은 동네 친구들 덕분이다. 학교에 다니면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 또래들이 동네 극장에 쇼 프로그램이 들어오면 가서 보고 흉내 낸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요즘처럼 유튜브나 동영상이 없을 때이므로 춤을 배울 데도 없었고 춤을 춘다는 것은 대단한 재주였다.

정동에 있던 TV 방송국에서 ‘젊음의 행진’이라는 하드록 연주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방청석에 들어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카메라에 자주 잡혔다. 무대로 내려와서 추라고 해서 본격적으로 춤을 춘 적도 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나는 영웅이었다. 당시만 해도 TV에 얼굴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대학에 진학하고는 신입생 환영회 무대에서 춤 솜씨로 유명해졌다. 그로 인해 졸업 때까지 4년간 역시 춤 선생이었다. 나이트클럽에 가면 자리에 앉지 않고 아예 플로어로 나가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까지 춤을 추고 오는 날이 많았다. 새벽 해장국집 할머니가 해장국을 말아 팔면서도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이 생각난다. 한심하게 봤을 것이다.

이때까지의 춤은 소위 막춤이었다. 트위스트, 소울 춤과 응용동작으로 춤을 만들었다. 귀를 찢는 듯한 음악도 좋았고 그에 맞춰 몸을 흔들 때의 쾌감 때문에 춤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프랑크푸르트 강가의 폐선에 춤추는 클럽에서 현지인들이 추는 춤을 보게 됐다. 우리나라 나이트클럽의 막춤과도 다르고 뭔가 매력이 있었다. [사진 pxhere]

프랑크푸르트 강가의 폐선에 춤추는 클럽에서 현지인들이 추는 춤을 보게 됐다. 우리나라 나이트클럽의 막춤과도 다르고 뭔가 매력이 있었다. [사진 pxhere]

20대에 미국 회사에 다녔었는데 그때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미국 사장이 추는 디스코를 처음 봤다. 그간 배운 막춤으로는 이상하게 음악과 맞지 않는 희한한 춤이었다. 춤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30대 젊은 나이에 중소기업에 임원으로 근무했다. 다른 임원들은 나보다 10년 연상이라 과묵하고 근엄하게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회사 창립 기념일에 외부에서 연예인을 초빙해 춤 경연대회를 했는데 내가 우승했다. 사장을 비롯해서 생산직 공원들까지 모두 놀랐다. 사회자가 소속을 묻는데 공장장이라고 하니까 믿지 않았다. 공장장은 나이도 많고 근엄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회사에 노사분규의 큰 태풍이 불 때도 인기 있는 공장장으로서 무난히 노동조합 측과 잘 수습해 나갈 수 있었다. 춤은 세대, 계층을 불문하고 친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댄스스포츠를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중반 서독에 주재원으로 나가 있을 때였다. 프랑크푸르트 강가의 폐선에 춤추는 클럽이 있었다. 혼자 있으니 밤마다 갔었는데 현지인들이 추는 춤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나이트클럽의 막춤과도 다르고 뭔가 매력이 있었다. 알프스 산맥 아래 농부들이 초원에서 축제를 벌일 때 추는 포크 댄스도 그리 어렵지는 않은데 뭔가 규칙이 있어 품격이 있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섞여 들어가 막춤을 추는데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격이 달랐다. 그리고 라인 강 로렐라이 언덕 근처의 와인촌에서 충격적인 춤 사위를 보고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와 십대의 손녀가 손님으로 와서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데 넋을 잃고 구경한 것이다. 알고 보니 자이브라는 춤이었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같이 추는 춤이라는데 더 매력이 있어 보였다. 저 춤을 언젠가 기어이 배우고 말리라는 결심이 섰다.

직장에서 자리가 잡히고 우리나라에도 댄스스포츠가 정식으로 들어왔다. 90년대에 중앙문화센터와 동아문화센터에서 부부 볼룸댄스로 화려하게 선을 보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집이 멀어 가까운 백화점문화센터에서 댄스스포츠에 입문했다.

그 후 더욱 정진해 경기대 댄스스포츠 코치 아카데미를 거쳐 댄스스포츠의 본고장 영국까지 가서 댄스스포츠를 배워 왔다. 올림픽공원 스포츠 센터 등 여러 곳을 거치며 댄스가 곧 생활이 됐다.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도 만들어 절정의 한 시기를 보냈다.

가장 뜻깊은 일은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편집 기자로 채용되어 일한 것이다. 전국 각종 댄스경기 대회에 잡지사 기자 자격으로 초대받고 댄스계에 발이 넓어졌다. 세계적인 프로 선수들을 만나 인터뷰한 것은 빛나는 훈장이었다.

마무리는 서울시 장애인댄스연맹에서 시각장애인들을 가르치며 같이 경기대회에 참가하면서 했다. 댄스를 봉사에 활용하고 선수로 활동하니 댄스에 입문한 보람을 느꼈다.

계속 춤을 배우며 끼를 발산하고 싶다.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댄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다. ‘한 우물을 파라 그러면 결국 이긴다’라는 내 좌우명도 여기서 나왔다. [사진 pxhere]

계속 춤을 배우며 끼를 발산하고 싶다.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댄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다. ‘한 우물을 파라 그러면 결국 이긴다’라는 내 좌우명도 여기서 나왔다. [사진 pxhere]

그간 댄스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여기저기 물어봤으나 만족할만한 답변을 듣기 어려웠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댄스스포츠 관련 책 9권을 냈다. 그중 3410페이지 책 ‘캉캉의 댄스이야기’는 내 대표작이다. 춤은 몸으로 설명하는 것이지 글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만든 책이다. 댄스는 문화사적, 심리적, 체육적 요소를 다 갖고 있다.

댄스에 발을 들여놓으면 패가망신한다는 편견 때문에 입문하지 못한 사람에 비해 행복한 시대를 누렸다. 희소가치 때문에 특별하다는 것과 건강에 좋다는 이유 덕분에 내 인생에서 댄스스포츠는 가장 나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제 가능하다면 다시 혼자 추는 힙합댄스 등을 배우며 끼를 발산하고 싶다.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댄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한 우물을 파라 그러면 결국 이긴다’라는 내 좌우명도 여기서 나왔다. 종로3가 전철역 12번 출구 쪽 유리벽에 캘리그라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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