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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MB 물가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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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소비자물가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소비자물가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며칠 전 기획재정부와 농림축산식품부가 식품기업 9곳을 불러 물가안정 ‘협조’를 요청했고, 이 자리에 공정거래위원회도 참석했다는 보도는 10여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데자뷰 혹은 기시감(旣視感)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물가와의 전쟁, 그 악전고투의 서막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문 정부 물가잡기 10년 전 데자뷰 #300조 대선공약 인플레 심리 자극 #새 정부 ‘MB 물가전쟁 시즌2’ 되나

 2000년 이후 가장 고물가 시대는 이명박(MB) 정부 때였다. MB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4.7%로 시작해 2% 후반으로 잠시 내려갔다 2011년 다시 4.0%로 올랐다. 고유가 등 외부 요인이 컸지만 내부 요인도 만만치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돈이 많이 풀렸다. 고환율도 한몫했다.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선 대외균형, 즉 경상흑자를 기반으로 하는 안정적인 외환보유액 유지가 중요하다는 ‘환율주권론자’가 MB 정부 초기에 득세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 때였다. 노무현 정부 말에 달러당 920원대까지 떨어졌던 환율이 1100원대 이상으로 유지되는 고환율 정책으로 흘러갔다. 수입물가는 치솟았고 물가관리는 더 힘들어졌다.

 물가관리는 개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미시 대책의 과제로 남았다. 신선식품 가격이 오르면서 소득에서 먹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엥겔계수가 치솟자 이른바 ‘MB물가’로 불리는 52개 생활필수품을 선정해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별 성과는 없었다. 2010년 배춧값이 비싸지자 청와대 식탁에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는 대통령 지시까지 보도됐다. 양배춧값도 배추 못지않게 비싼데 뭔 소리냐는 비판을 받았다.

 MB는 2011년 물가관계장관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매주 장관회의를 열어 물가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기재부 차관이 주재하던 물가회의가 장관 주재로 바뀌었다.

 대통령이 “기름값이 묘하다”고 한마디 하자 정부는 석유가격 TF를 구성해 기름값을 조사했고 정유사는 ‘자진납세’하듯이 기름값을 내렸다. 치킨값이 비싸다는 대통령 언급이 알려지자 5000원짜리 저렴한 ‘통큰치킨’을 팔던 롯데마트는 뜻밖의 광고효과에 잠시 쾌재를 부르다 원가 이하로 팔아 영세상인이 울상이라는 정무수석의 트윗 한 방에 결국 판매를 중단했다. 대통령과 정무수석이 치킨값까지 챙기던 웃지 못할 시절이었다.

 경쟁당국인 공정위가 ‘물가당국’처럼 나선 것도 그 시절이다. 김동수 당시 공정위원장은 2011년 ‘가격불안품목 감시·대응 대책반’을 만들어 물가전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물가당국 공정위의 위상이 높아지자 외식비가 비싸다며 담합하는 식당을 공정위에 고발하겠다는 기재부 차관의 발언까지 나왔다.

 담합이 사라지고 경쟁 압력이 커져 개별 물가가 내려가는 건 바람직하다. 하지만 물가 안정을 위해 경쟁정책이 도구처럼 이용되면 문제다. 물가 안정이 경쟁정책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MB식 물가잡기는 ‘시장 프렌들리’를 내세웠던 정권 초기의 원칙을 무너뜨렸고, 경쟁당국 공정위에도 두고두고 부담이 됐다.

 요즘 물가는 넉 달 연속으로 3%대다. 고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같은 외부 요인이 크지만 코로나19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쏟아부은 돈도 영향을 미쳤다. 한은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지만 국채금리 급등을 막기 위해 국채 매입도 늘리고 있다. 그만큼 시중에 자금이 더 풀리는 셈이다.

 올해 물가를 상고하저로 낙관했던 정부와 한은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는 것 같다. 에너지와 농·축·수산물을 중심으로 시작된 물가 오름세가 외식비 같은 서비스로까지 번지고 있다. 원가 압력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이 앞다퉈 제품가격을 올리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인플레 기대심리다. 문재인 정부에서 급등한 집값을 비롯한 자산가격 상승이 인플레 기대심리를 키울 수 있다. 정부의 거듭된 추경과 아낌없이 퍼주겠다는 정치권 공약도 주범이다. 대선 공약 비용으로 민주당은 ‘300조원 이상’, 국민의힘은 266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스스로 계산한 거니 실제로는 더 들어갈 것이다. 이마저도 지자체가 숙원사업으로 건의한 굵직한 지방공약은 빼고 계산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대선이 끝나면 지방선거가 기다린다.

 고물가는 자산가에 유리할 뿐, 임금소득자나 저소득층의 삶을 곤궁하게 한다. 약자를 돕겠다며 쓰는 재정이 고물가와 고금리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앞에서 생색내고 뒤에서 뒤통수치는 격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새 정부에서 ‘MB 물가전쟁 시즌 2’가 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다.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