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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다리를 불태워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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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이탈리아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1930년 이탈리아 남부 투리의 파시스트 감옥에서 쓴 에세이 『옥중수고』에 나오는 구절이다.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에서 그람시의 이 말을 화두로 얘기를 풀어간다. 서순은 책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특징을 넓은 강에 빗대 설명한다. “오래된 강둑이 뒤에 있지만, 반대편은 아직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물살 때문에 뒤로 밀려서 빠져 죽을 위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

시상식에서 셀카를 찍는 남자 쇼트트랙팀. [뉴시스]

시상식에서 셀카를 찍는 남자 쇼트트랙팀. [뉴시스]

지난 4일 개막한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이번 주말(20일)에 폐막한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12월 한국 선수단의 베이징올림픽 목표를 “금메달 1~2개, 종합 순위 15위권”이라고 발표했다. 홈 어드밴티지를 누린 4년 전 2018 평창올림픽의 종합 6위(금 5, 은 8, 동 4)는커녕, 부진했던 8년 전 2014 소치올림픽의 종합 13위(금 3, 은 3, 동2)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다. 베이징올림픽 개막 이후 메달 레이스를 보면 체육회의 이번 전망은 적중할 듯하다. 이쯤 되면 엘리트 스포츠의 위기에 대한 성토와 정부와 체육회에 그 책임을 묻는 질타가 쏟아져 나올 법한데, 웬일인지 잠잠하다. 왜일까. 한국 스포츠는 이제 ‘낡은 것이 죽어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아 병적 징후가 나타나는’ 공백기를 거의 다 지났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에서 베이징올림픽으로 이어진 지난 4년이 한국 스포츠에는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 공백기’였다. 평창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불거진 쇼트트랙 성폭행 파문이 그 시작이었다. 점차 스포츠계 구성원이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비위를 저지른 메달 기대주가 국적을 바꾸기도(쇼트트랙 임효준), 징계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기도(쇼트트랙 심석희) 했다. 그람시가 말한 ‘공백기에 나타난 병적 징후’다. 그래도 원칙을 고수했다. 무엇보다 선수와 팬의 마음가짐이 확실히 달라졌다. 더는 “은메달을 따서 죄송한” 선수도, “금메달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수를 비난하는 팬도 보이지 않았다. 쇼트트랙 계주에서 동반 은메달을 딴 한국 남녀 선수들은 시상대에서 유쾌하고 발랄했다. 이를 지켜보던 팬도 환호와 격려를 소셜미디어 등에 쏟아냈다.

새로운 것의 태동기에는 누구나 불안하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죽어간 낡은 것’으로 회귀하려는 반동적 저항도 만만치 않다. 분명한 건, 우리는 이미 강을 건넜다. 그다음은 다리를 불태울 차례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