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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 논설위원의 시선

지금 녹음하는 중이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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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부인 김혜경씨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과잉 의전' 논란과 관련해 사과한 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경기도청 7급 공무원의 통화 녹음 폭로로 의혹이 불거졌다.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부인 김혜경씨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과잉 의전' 논란과 관련해 사과한 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경기도청 7급 공무원의 통화 녹음 폭로로 의혹이 불거졌다. [뉴시스]

 놀라지 마시길. 그동안 저와 스마트폰으로 통화한 분들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미리 알리지 않고 대화를 녹음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력이 점점 감퇴한 탓이 큽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겨서요. 사적 대화야 녹음할 이유가 없고 주로 취재 목적상 필요한 경우, 즉 취재원과의 대화였습니다. '사적 대화지만 공적 성격을 띤다'고나 할까.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은 말들을 나중에 복기해 활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약점을 잡아 선거 직전에 터뜨릴 의도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특이 유전자 자체가 없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니 녹음해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게 훨씬 많습니다. 마치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사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읽지 않는 것과 비슷한거죠. 독서가 아니라 서적 감상? 녹음을 풀어 법정 증거로 사용되는 녹취록으로 만든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바꿀 때마다 그것들과 작별도 했어요. 좀 편하자고 녹음하면서도 쓰레기 더미 위에 피어난 독초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 늘 있었습니다. 사전에 동의받지 않은 녹음에 용서를...
 여기까지는 스마트폰 녹음·녹취와 관련한 대화 중 동료가 내놓은 진솔한 심경 고백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절대, 제 얘기 아님). 요즘 대통령선거 판에서 네거티브성 녹음 파일과 녹취록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녹음·녹취에 유난스럽습니다. 한번 틀어져 민·형사 소송으로 번지면 3심까지 끝장을 보고야 마는 기질과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문재인 정부 5년동안 극과 극의 진영 다툼이 심화되더니 급기야 이번 대선은 '대선 승리 아니면 적폐 투옥', '모 아니면 도'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9월 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겨냥한 '고발사주' 의혹이 터지자 김웅 의원은 "기억이 안 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달 뒤 조성은씨 휴대전화에서 2020년 4월 3일 두 차례 이뤄진 17분37초 분량의 통화 내용이 복구되면서 거짓말이 들통났습니다. 다만 공수처가 수사를 맡은 게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고 공수처도 미궁에 있습니다. 대장동 개발특혜 의혹 수사도 회계사의 녹취록이 결정적 동인이 됐습니다. 수년간 김만배씨와의 대화를 몰래 녹음해 검찰에 안겼습니다.
 대선 후보자 아내들도 녹음·녹취 폭로의 타깃이 됐습니다.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 촬영기사 이명수씨가 지난해 7월부터 6개월간 누나, 동생하며 나눈 수십차례 1대 1대화를 풀어 만든 게 '김건희(윤석열 후보 아내) 7시간 녹취록'입니다. 이 씨는 김 씨와 모친의 10년 묵은 송사를 도와주겠다며 의도적으로 접근한 뒤 녹음을 했다고 합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 미투운동 폄훼, 무속인 관련 부정적 발언 등의 약점을 캔 겁니다. 드라마 '마이 네임'에서 경찰에 침투하는 여자 조폭(한소희)같은 역할인 거죠. 그런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예고와 달리 역풍이 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같은 화법에 팬덤 현상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김혜경씨(이재명 후보의 아내)의 법인카드 사적 유용, 공무원 심부름 등의 비위는 경기도청 별정직 7급 공무원이 공개한 총무과 5급 공무원 배모씨와의 8개월치 통화 녹음으로 드러났습니다. 매번 12만원 한도, 개인카드 선결제 후 법인 카드 재결제 등 안 들키려고 나름 최선을 다한 것 같습니다. '경기도 영주(領主) 부인'이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생활 비위'는 작은 것 같지만 서민들 가슴에 남기는 상처가 크고 깊습니다. 조국 부부가 지탄을 받은 것도 자녀 진학을 위해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무너뜨렸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대화 녹음 파일 공개로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스마트폰의 자동 녹음 기능을 활용해 모든 통화를 습관적으로 녹음해 온 사실도 드러났고요.
 언제든지 대화나 전화 통화가 녹음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국가 권력이라는 '빅 브라더'와 별개로 스마트폰 기기에 의한 염탐, 즉 '스몰 브라더'의 세상(조지 오웰 『1984』)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녹음 내용이 그냥 잠자게 될지, 아니면 폭로될지는 녹음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선의를 갖고 있다면 '별일 없이 잘' 살겠지만...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겁니다. 통화 인사법을 바꾸는 것.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대신 "여보세요, 녹음하세요?"라고 물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대선 앞 네거티브 녹음·녹취 폭주 #은밀하게 준비...후보 아내도 타깃 #스마트폰 염탐 '스몰 브라더'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