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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좋은데 페미는 싫다? 외신들이 심해생물보듯 뜯어보는 ‘한국 이대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신인류의 출현이라도 되는 걸까요. 해외 언론이 한국 20대 남성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 남성의 ‘반페미니즘 열풍’ 때문입니다. 바다 건너 미디어들은 생경한 심해생물을 보듯 이 현상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습니다.

[정글]

미국 주류 미디어인 뉴욕타임스·CNN뿐 아니라 일본·프랑스·독일·이탈리아 언론도 지난해부터 우리나라 청년에게 부쩍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호의적이기보다 싸늘합니다. 한국은 결코 ‘성 평등’이란 과목에서 우등생이 아니거든요.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최대로 벌어져 있고, 주요 기업 임원진 중 여성 비율은 꼴찌를 다투며,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도 하위권을 맴돌죠. 그런데도 반페미? 시대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 반동으로 비춰지기 십상이죠.

'페미니즘은 어떻게 한국에서 더러운 말이 됐나'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7월 게재된 미국 외교지 더 디플로맷의 기사. 지난해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페미니즘 저격 논란 이후 외신들은 부쩍 한국 젊은 남성의 반페미니즘 움직임을 주시한다. 더 디플로맷 인터넷사이트 캡처

'페미니즘은 어떻게 한국에서 더러운 말이 됐나'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7월 게재된 미국 외교지 더 디플로맷의 기사. 지난해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페미니즘 저격 논란 이후 외신들은 부쩍 한국 젊은 남성의 반페미니즘 움직임을 주시한다. 더 디플로맷 인터넷사이트 캡처

그러니 해외 언론 대부분 논조는 대략 ‘쯧쯧, 시대를 못따라가는 남자들이 큰소리치기는…’에 가깝습니다. 스타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CNN의 한 프로그램에서 이런 움직임을 미국 내 백인 우월주의적 반페미니즘 운동과 엮어서 비판하기도 했죠.

반페미니즘=백인우월주의?

서구의 반페미니즘을 주도하는 세력은 백인우월주의 세력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매노스피어(manosphere·남성계)로 묶이는 이 반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인종에 대해서도 차별적 성향을 띠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색 인종이 높은 출산율을 무기로 세계를 장악해가는데, 백인 출산율은 낮아져만 간다. 이게 다 여성 해방을 내세우는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논리예요.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리를 앞세우면서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던 전통적 여성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거죠.

매노스피어의 논리는 때론 폭력 행위로 이어집니다.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모스크와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의 월마트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주범도 매노스피어와 관련된 인물이었죠. 두 사건은 각각 51명, 20명이 사망한 끔찍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서구 언론이 반페미니즘에 예민한 이유죠.

2019년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모스크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브렌튼 태런트. 그는 인종차별적 성향을 갖고 있는 '매노스피어'의 사상을 추종하는 자로 알려졌다.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모스크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브렌튼 태런트. 그는 인종차별적 성향을 갖고 있는 '매노스피어'의 사상을 추종하는 자로 알려졌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세계의 모든 반페미니즘 움직임을 폭력과 연결된다고 도매금으로 치부하는 건 우리 청년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어요. 한국 청년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누구보다 싫어하지만 성 평등 의식은 높기 때문이죠. 이율배반적인 태도 같기도 하지만요.

한국일보·한국리서치의 지난해 조사에서 20대 남성 중 77.3%가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거부감이 든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최종숙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이 2020년 낸 논문을 보면 20대 남성의 성 평등 의식은 20대 여성에 뒤질 뿐 다른 어떤 세대·성별보다 높은 편이었어요. ‘남성의 육아를 수용한다’는 항목에서 3.97점을 받아 3.8점을 받은 30대 여성보다도 높았어요.

최종숙 논문 '20대 남성 현상 다시 보기: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최종숙 논문 '20대 남성 현상 다시 보기: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20대 대학생인 김승주 청년21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대 남성들은 성 평등과 페미니즘을 다른 개념이라고 봐요. 이대남이 생각하는 성 평등은 ‘육아? 우리도 할게’, ‘경력 단절? 보상해야지’ 이런 식으로 과거에 여성만 지고 있던 의무나 페널티를 완화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게 현재 여성들에게 여성 가산점, 여성 할당제와 같은 ‘결과의 평등’을 제공하자는 건 아니에요.”

해외 언론이 분석한 ‘반페미’ 이유

지난해 12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인근에서 신남성연대 주최로 '페미니즘 규탄' 집회가 열렸다.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뉴스1

지난해 12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인근에서 신남성연대 주최로 '페미니즘 규탄' 집회가 열렸다.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뉴스1

해외 언론 중엔 이런 차이를 간파하고 현미경 들이대듯 분석한 곳도 있어요. 한국 전문가와 20대 남성의 현장 목소리를 듣기도 했죠. 뉴욕타임스, 포린폴리시, 더 디플로맷 등 미국 미디어와 르 피가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등 유럽 미디어를 종합해, 한국 20대 남성들의 목소리를 세 가지로 요약해봤어요.

첫째는 징병제예요. 외신과 인터뷰한 수많은 20대 남성들 입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은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말이에요. 군대에선 자유를 잃고 심지어 건강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국가는 나 몰라라 한다는 거죠. CNN은 2019년 기사에서 “한국 청년들은 그들 아버지와 달리 징병제를 남성 의무로만 생각지는 않는다”며, 한 연구자의 입을 빌려 “징병제가 존재하는 한 남녀 갈등은 해결되기 어렵다”고 했어요.

반면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기사에서 “반페미니스트들은 징병제 때문에 취업에 불이익을 겪는다고 하지만, 많은 여성이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을 겪고 있고 가사 노동도 대부분 감당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김승주 대표는 이에 대해 “모병제나 징병제를 하는 나라 중에서도 징병률이 낮거나 여성도 징병하는 나라가 많아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 징병제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죠. 남자들이 받는 징병의 실질적 피해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보상도 미미해요. 사실 이건 ‘미샌드리(misandry)’라는 넓은 의미의 남성 혐오에 해당합니다”라고 주장해요.

징병제는 한국 20대 남성이 반페미니즘 성향을 보이며 내거는 이유 중 하나다. 군대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일이 있지만, 이에 대한 보상이 적절치 않은데다 희생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믿어서다. 사진은 2010년 11월 24일 오후 북한군의 연평도 해안포 포격으로 전사한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유낙준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 조문하는 장면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징병제는 한국 20대 남성이 반페미니즘 성향을 보이며 내거는 이유 중 하나다. 군대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일이 있지만, 이에 대한 보상이 적절치 않은데다 희생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믿어서다. 사진은 2010년 11월 24일 오후 북한군의 연평도 해안포 포격으로 전사한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유낙준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 조문하는 장면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둘째는 20대가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부장제와 성차별로 상대적 이득을 얻고 여성에게 피해를 준 건 기성세대 남성이라는 거죠. 과거에는 남자가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남녀가 겨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미 평평한 운동장에서 겨루고 있다는 겁니다. 한 20대 남성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어요.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기성세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속죄하는 건 20대 남성들이에요.”

그래서 2019년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 차별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19~24세 남성은 33.8%, 24~29세 남성은 47%에 불과했어요. 같은 연령대 여성이 각각 90.8%, 86.2%인 걸 보면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차이죠.

셋째는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입니다. 20대 남성들은 메갈리아,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 온라인 커뮤니티를 페미니즘의 대표 격으로 받아들이면서 반페미니즘 정서가 전반적으로 퍼졌다는 겁니다. 특히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당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문구가 온·오프라인 상에 등장하자 온건한 남성들조차 불쾌감을 느꼈다는 거죠.

프랑스 언론 르피가로와 인터뷰에서 한 서울 시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에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를 크게 약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선 여성, 남성 모두 관습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다른 성별에 피해를 보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더 디플로맷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양성 평등을 위한 이타적 캠페인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인해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다.”

혐오에 혐오로 맞선 페미니즘

한국의 페미니즘은 2015년을 기점으로 나뉘어요.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페미니즘을 이전 시대 여성인권 운동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소개했어요. 당시 일베를 중심으로 퍼지던 ‘여성혐오’에 똑같은 방식으로 맞섰죠. ‘김치녀’처럼 여성을 업신여기는 말을 그대로 ‘한남충’이라고 되돌려줬어요. 상대가 조롱하고 혐오하는 그대로 갚아주는 것, 그들은 이걸 ‘미러링’이라고 불렀어요. 혐오에 재미의 요소가 결합하자 감정적 폭발력이 생겼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렸어요.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는 이렇게 설명해요. “(2015년 즈음은) 인터넷에서 여성 혐오 표현이 많이 등장하던 시기였어요. 지금의 10대·20대 여성들은 성 평등과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라 권리에 민감하고 예전 세대처럼 이런 불의를 참지 않아요.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신자유주의에 노출된 세대기도 하구요. 실천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세대죠.”

2018년 여성들이 경찰의 여성에 대한 강경 수사와 판결을 비판하며 혜화역 인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박사라 기자

2018년 여성들이 경찰의 여성에 대한 강경 수사와 판결을 비판하며 혜화역 인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박사라 기자

하지만 메갈리아·워마드에선 일베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명목으로, 남성 혐오 조장 표현들이 등장하고 남성 대상 성범죄까지 나오면서 물의를 빚었어요. 온라인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프라인 시위에서도 남성 혐오 문구가 등장했죠. 여성가족부는 자정 작용이 있을 거라며 감쌌어요. 지금의 20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와 동의어 취급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죠.

처음엔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시작했더라도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사회 운동은 사람들 자유를 얽매고 갈등을 유발하기도 해요. 지난해 영국에선 스톤월이라는 유서 깊은 페미니즘 단체가 대학과 공공기관에 사상을 강요한다는 폭로가 잇따랐어요. 스톤월은 성 소수자의 인권 향상을 위해 1989년 생긴 단체예요.

스톤월 추종자들은 에섹스 대학이 여성 교도소와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강연을 기획하자 반대 시위를 열고 압력을 행사해 취소시켰어요. 영국 의회도 한때는 이 단체를 지원했지만,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식의 대응을 보고선 지난해 지원을 모두 철회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팃포탯 전략만 난무하는 지금, 남녀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뭘까요. 김승주 대표는 이렇게 말해요. “여성 글자가 붙은 수많은 정책 속에서 남성은 외면받고 있고 소외된다고 느껴요. 예를 들면 ‘왜 만날 여성 자살만 예방하냐? 우리는 사람도 아니냐’ 이런 거예요. 이대남 정서의 핵심은 여자 거를 뺏자는 게 아니라 우리도 좀 봐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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