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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잘 버텼어”…반세기전 연극 '건널목 삽화' 무대 서는 유진규·기주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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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초연한 연극 '건널목 삽화'의 컴백 무대에 함께 서는 기주봉(왼쪽)·유진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0년 전 초연한 연극 '건널목 삽화'의 컴백 무대에 함께 서는 기주봉(왼쪽)·유진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진규(70)와 기주봉(67). 두 배우가 처음으로 한 무대에 선다. 오는 23~27일 서울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공연하는 2인극 ‘건널목 삽화’에 함께 출연한다. 원로연극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늘푸른연극제’의 올해 작품 네 편 중 하나다.

14일 연습실 인근 서울 성북동 한 카페에서 “하루 6시간씩 연습 중”이라는 이들을 만났다. 한국 마임의 역사를 연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와 150여편 영화에서 주조연을 넘나들며 감초 배우로 자리매김한 기주봉을 뭉치게 만든 구심점은 연출가 방태수(77)다.

연출가 방태수. [사진 스튜디오반]

연출가 방태수. [사진 스튜디오반]

방태수는 1967년에 극단 에저또를 설립해 소극장 시대를 최초로 열었던 우리나라 실험연극의 선구자다. 말이 막혀 머뭇거릴 때 내뱉는 간투사 ‘에∼’ ‘저∼’ ‘또∼’에서 극단 이름을 땄다. 대사 중심의 사실주의 연극에서 벗어나 표현의 다양화를 추구하겠다는 의미였다. 1972년 극단 에저또에 들어간 유진규는 그곳에서 몸짓의 언어에 빠져들었다. 기주봉은 1973년 극장에서 처음 만난 방태수가 “너 눈빛 좋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평생 생생하다. 중학생 때부터 배우의 길을 꿈꿔온 기주봉에게 확신을 준 한마디였다. 형인 기국서 극단76 대표가 이번 공연 ‘건널목 삽화’의 협력연출을 맡으며 출연을 제안했을 때 선뜻 응한 이유가 됐다.

‘건널목 삽화’는 1970년 극작가 윤조병(1939∼2017)이 계간지 ‘연극평론’ 2호에 발표한 작품으로, 1972년 극단 에저또에서 초연했고 80년대 초반까지 에저또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종종 무대에 올랐다. 초연부터 이번까지 쭉 연출을 맡아온 방태수는 지난 9일 ‘늘푸른연극제’ 기자간담회에서 “50년 전 소극장 연극이자 실험적인 연극이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드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연에선 극작가 윤조병의 아들인 윤시중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무대미술을 맡아 의자 하나가 전부였던 50년 전 무대에 볼거리를 더했다.

1972년 '건널목 삽화' 초연 장면. 유진규가 철도원 연기를 하고 있다. [사진 유진규]

1972년 '건널목 삽화' 초연 장면. 유진규가 철도원 연기를 하고 있다. [사진 유진규]

초연에 이어 이번에 두번째로 ‘건널목 삽화’ 공연에 나선 유진규는 “오랜 만에 대사를 하려니 어렵다. 자꾸 옛날식 대사 투가 나온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기국서 선생이 ‘너 보면 연극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유진규로선 1979년 고금석 연출의 연극 ‘포포왕자와 피피공주’ 이후 43년 만에 대사 있는 공연을 하는 셈이다.

철도원과 사나이, 기차 건널목에서 마주친 두 인물의 대화로 이뤄진 ‘건널목 삽화’는 독특한 연극이다. 단순한 스토리만 따라가선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부조리극인데다, 대사 분량만으론 공연 시간이 40분 정도밖에 안 된다. 비어있는 시간과 의미를 채워야 하는 몸짓의 몫이 큰 작품이다. 초연 당시 ‘대사와 몸짓의 만남’이란 의미에서 ‘마임 드라마’를 표방했으며, “기성 연극의 틀을 벗어나 ‘움직임과 소리와 빛’을 중심으로 한 표현주의적인 형태의 실험연극”이란 평단의 평가를 받았다.

반세기 전 작품이 다시 관객을 만나게 되는 의미는 뭘까. 사나이 역의 기주봉은 “시대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이야기한다”는 데서 그 가치를 찾았다. “똑같은 숲을 묘사하면서 철도원은 ‘우거진 숲’이라고 하고, 사나이는 ‘민둥산에 진흙탕’이라고 한다”면서 “지금 사는 이 세상도 누군가에게는 숲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삭막한 곳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작품의 배경은 전쟁 직후다. 어느 전쟁인지는 명시돼있지 않다.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며 그 전쟁의 폭력적 상황에 노출돼 살고있는 오늘날 관객에게도 유효한 동시대성이다. 두 사람은 철도원이 “지금까지 잘 버텼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이 작품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으로 꼽았다. 전쟁으로 불구가 되고 친구를 잃은 사나이, 아내의 매춘을 눈감으려 매일 귀가시간을 늦추는 철도원뿐 아니라 갖가지 역경에 시달려온 관객들에게도 여운 깊을 대사다.

'건널목 삽화' 2022년 공연 포스터. [사진 프로젝트그룹 결사대]

'건널목 삽화' 2022년 공연 포스터. [사진 프로젝트그룹 결사대]

이들은 ‘건널목 삽화’에 대해 “극단 에저또의 실험정신에 가장 걸맞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연극적 표현법을 찾아보겠다는 에저또의 시도는 반세기 동안 얼마나 구현됐을까. 이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은 씁쓸했다. 유진규는 “과거보다 연극이 활성화 됐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연극은 어디로 갔나”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기주봉은 “순환이 안 된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돈을 버는 곳에서 돈을 못 버는 곳으로 돈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연극계 내부뿐 아니라 배우 개인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영화를 해서 돈을 벌면 소극장 만들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안 된다”면서 그 스스로도 “조그만 공간 하나 갖추면 공연하면서 놀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2년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이 큰 연극계의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이번 ‘건널목 삽화’ 공연도 방역 때문에 총 100석 객석 중 50석씩밖에 열지 못한다. 이들은 “공연이 계속 미뤄지면서 젊은 연극인들이 지원 사업으로 연명하며 너무 어렵게 살고 있다”(유진규)며 “선배로서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기주봉)고 했다. 유진규는 “각 지자체의 문화예술회관 등 관련 기관에 예술인들을 채용해달라”고 제안했다. “예술을 써먹는 사회가 아닌 예술과 함께 세상을 만드는 사회가 돼야 한다”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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