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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지예의 인정불가

이대남 신드롬은 기획된 것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신지예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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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의 인정불가]

더불어민주당의 어긋난 이대남 전략을 비판하는 박가분 작가 글에 대한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의 답글입니다.

위기를 언급하지 않고는 내일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때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어느새 2년이 지났지만 그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지역 갈등, 세대 갈등도 모자라 성별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을 통한 각 진영의 이익 추구에 몰두 중이다.

지난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추모객들. [중앙포토]

지난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추모객들. [중앙포토]

언어기호학에서 이름은 호명되는 대상의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기능을 한다. 그저 대상을 지명하는 걸 넘어 사고하는 방식, 그리고 외부와 관계 맺는 태도까지 구속할 수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름이 갖는 강력한 힘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일 거다. 이대남이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분석하기 전에 누가, 왜, 이들을 이대남이라고 부르는지 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대남은 이십대 남성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30대 남성까지도 아울러 같은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 안에는 1인 가구, 대학원생, 알바생, 회사원, 자영업자 등 다양한 배경과 삶을 가진 시민들이 있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개인을 이대남이라고 묶어 부르는 셈이다.

이대남이라는 정치 공작 

왜일까. 이유는 사실 뻔하다. 시민 간의 화합을 막고 서로 갈등하게 만들어 그 분열로 이득을 취하려는 일부 집단의 정치적 공작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갈등을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선거다.선거 기간 동안 입장이 서로 다른 집단들은 토론하며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합일점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정치가 이를 악용한다면 선거는 오히려 공동체 의식과 상호 신뢰를 파괴하는 최악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대남이라는 가상 집단을 앞세운 일련의 남성 우월주의 집단들(스스로는 역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은 OECD 국가 가운데 임금 격차가 가장 크고 유리천장 지수가 가장 높으며, 상장사 임원 5% 미만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 여성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공정을 말하지만 정작 이면의 불공정은 언급조차 안 한다. 심지어 일부는 "지난 4년 동안 민주당은 정신병 걸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조정됐다"고 말한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에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에게 ‘피해 호소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민주당 주요 당직과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에 있는데 무슨 페미의 지배인가.

이런 갈라치기 정치 공작의 결과로 2030 여성과 페미니즘은 사회의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낙인찍혔고 사악한 이념으로 조롱받고 있다. 최근의 반(反) 페미니즘 흐름은 페미니스트를 이기적인 남성혐오 집단으로 상정한다. 틀렸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혐오하지도, 성차별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소수자든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대남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여성 불안 남성 불만 모두 해결하는 정치

여성의 고통은 현실이다. N번방 사건, 카톡방 집단 성희롱 사건, 양진호 웹하드 카르텔 사건, 버닝썬 사건, 공군 내 성폭력 사건, 화장실 몰카 사건, 대학교 미투 등 일상적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 10년간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86.7%가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강남역 앞, 혜화역 앞으로 뛰쳐나왔고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외쳤다. 거리를 안전하게 걷고 싶고 성 착취 영상물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요구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일인가.

한국 젊은 여성 대부분은 여성 불안이 해소되어야 하듯, 청년 남성이 떠안고 있는 사회적 고통도 해결돼야 한다고 본다. 남성의 절반만 군대 가던 586세대와 달리 현재 20대 남성 징집률은 90%에 달한다. 가뜩이나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극심한 상황에서 18개월을 군대에서 보내는 건 과도한 부담이 맞다. 어렵사리 일을 얻어도 또래 여성보다 늦게 취업하기 때문에 뒤처진다는 불안 역시 근거 없는 피해의식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국방의 의무를 다한 청년들에게 그만한 보상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수고를 '국방의 의무'라며 가볍게 넘겼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이미 병역 의무를 마친 일정 연령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합의 가능하다

이대남이든 이대녀든 앞선 세대보다 가난할 게 확실한 세대, 평생 일해도 아파트 하나 마련할 수 없는 세대, 기성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한 취업난을 겪는 세대라는 점에서 똑같다. 20대의 고난은 다른 성을 가진 이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가린 채 서로를 적대시하게 하는 정치적 갈라치기는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남에 대한 악의적 낙인부터 걷어내야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증오를 넘어서야 한다. 박가분 작가가 제안한 공론화 위원회 같은 숙의민주주의의 토대는 공감과 합의에서 나온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대한민국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모두 두려움과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공동의 번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진짜 숙의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