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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코 베이징’ 한국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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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이번 겨울올림픽은 기발하고도 기막힌 패러디를 탄생시켰다. 지난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한국의 황대헌·이준서 선수가 잇따라 실격 판정을 받은 뒤였다. 그날 쇼트트랙 경기장의 심판은 오로지 중국 선수만을 위해 존재했다. 예선과 결선에서 한 번도 1위를 하지 못한 중국 선수가 좀비처럼 되살아나 금메달의 주인이 됐다. 한국 팬들은 ‘눈 뜨고 코 베이징’이란 촌철살인으로 허탈감을 달래야 했다. 이후 경기를 보는 팬들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경쟁 상대가 중국인지, 아닌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됐다. ‘심판은 중국 편’이라는 확증편향이 생겨버린 것이다.

일본 언론에선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의 부정 출발 판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미심쩍은 판정으로 메달 후보였던 일본 선수가 레이스를 망쳤다는 주장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종목도 금메달은 중국 선수 차지였다. 팬들에겐 더 근원적인 의문까지 더해졌다. 0.001초의 차이를 가리는 마당에 “레디~” 하면서 출발에 관여하는 심판이 필요한가. 나노 세계를 다룰 능력이 ‘사람 심판’에게 애당초 있기나 한 것인가.

지난 7일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 황대헌이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1조 경기에서 중국 선수들을 추월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7일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 황대헌이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1조 경기에서 중국 선수들을 추월하고 있다. [뉴시스]

심판 불신의 결과는 카오스다. 이전의 열정과 꿈은 길을 잃는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모토가 허망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이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라는 올림픽 선서도 무색해진다. 도미노 넘어지듯이 신뢰의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붕괴’가 목격되고 있다. ‘한때’ 심판을 자부했던 법원, 검찰, 경찰, 감사원, 그리고 공수처의 처지가 그렇다. 월성 원전 조기 폐쇄 의혹을 파헤친 뒤 감사원은 식물 기관이 됐다. 대선 관련 고소·고발 사건이 탁구공처럼 검찰과 경찰, 공수처를 튀어 다니지만, 국민은 영문을 모른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 모해위증 교사 사건 수사 방해’ 혐의에 대한 결론이 내려지는 과정은 한심함의 극치였다. 수사 250일 만에 공수처가 무혐의 결론에 도달한 사이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의심(한명숙 모해위증)받았고, 검사는 범죄자(위증 교사) 취급을 당했으며, 검찰총장은 훼방꾼(교사 사건 수사 방해)으로 몰렸다. 우리의 정의구현 시스템이 베이징의 쇼트트랙 심판 신세로 전락했다.

도미노는 멈추지 않았다. 유력 대선 후보가 “제가 지면 없는 죄를 만들어서 감옥에 갈 것 같다”고 하소연할 지경이다. 이젠 심판이 누구 편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눈 뜨고 벌어진 현실에 기가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