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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빙판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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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1636년 12월 4만5000명의 청나라 부대가 일제히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나흘 만에 개성에 거쳐 10여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에 도착했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조선 국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려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대가 인근 도로를 다 점령했다는 소식에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조선은 청나라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내려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조선은 마음먹은 대비를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두 달 만에 백기를 들었다.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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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나라 군대의 속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추위였다. 압록강·청천강·임진강 등 국경부터 한양에 이르기까지 만나게 되는 주요 강들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만주족 기마병들은 거침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9년 전 벌어진 정묘호란 때도 청나라가 군대를 일으킨 것은 겨울이었다. 마침 이 무렵 동아시아는 소빙기(小氷期)를 맞이해 겨울이 그 어느 때보다 추웠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촉즉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의 침공이 2월 안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 이유로 기후를 꼽았다. 3월이 되어 날씨가 풀리고 동토(冬土)가 녹기 시작하면 길이 질퍽질퍽해져서 전차가 이동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세기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떠나며 지독한 추위에 후퇴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동장군(冬將軍)이라는 말도 이런 역사에서 만들어졌다. 날씨를 잘 이용할 줄 아는 것도 전쟁의 열쇠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