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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 겁난다" 소리없는 괴물 시달리는 100만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청각 장애가 있는 김재호(64) 한국청각장애인협회 협회장은 일과 중 가장 긴장하는 시간으로 ‘출퇴근 시간 지하철’을 꼽는다. 오른쪽 귀에 인공와우(달팽이관)를 달고 있지만, 지하철 내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 지금이 어느 역인지 화면을 보거나 안내 방송을 듣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 협회장은 “앉아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쉬거나 졸면서 가도 되는데, 청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게 안 된다”며 “피곤해도 지하철만 타면 긴장하게 된다”고 했다.

김 협회장은 세 살 무렵부터 중이염을 앓았다. 만성 중이염으로 고막이 썩어들어 가자 10살 때 양쪽 고막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청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보청기를 쓰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키가 큰 탓에 교실 뒤편에 앉았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 협회장은 “선생님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멀거니 앞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고 떠올렸다. 40여년간 보청기를 착용한 끝에 그는 2001년 인공와우 이식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오른쪽 귀 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다.

지난해 11월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감각장애인 선거공약연대 출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1월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감각장애인 선거공약연대 출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뉴스1]

경증 청각장애 앓는 '난청인'들

그는 ‘난청인’이다. 보건복지부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진 않았지만, 보청기 없이 의사소통이 힘든 경증 청각장애인을 난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제표준기구(ISO)에선 35~69 데시벨(dB)의 청각 손실을 본 이들로 정의한다. 반면 ‘농인’은 보청기를 착용해도 소리를 듣기 어려운 이들로, 70데시벨 이상 청각이 손실된 경우를 뜻한다. 한국청각장애인협회는 난청인들 중심의 단체다.

2020년 5월 기준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국내 청각장애인 수는 38만 4000여명. 난청인은 공식 집계된 통계가 없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등록되지 않은 국내 난청인이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난청이어도 경증이면 진단을 받지 않고 방치하거나, 고령으로 인한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실제로 2020년 기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난청 진료 환자는 약 63만명이었다.

난청인들은 장애 정도에 맞는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중 ‘수어를 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은 12%, 주 의사소통 방법으로 수어를 꼽은 응답자는 3%에 그쳤다. 반면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응답은 74%였다. 김 협회장은 “수화를 쓰지 않는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보조하거나 재활을 돕는 정책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공공시설에 청각 보조장치 설치해야” 

한국청각장애인협회와 시민단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등은 제20대 대선 후보들에 보청기 사용 개선을 위한 공약을 촉구하고 있다. 공공시설에 ‘히어링 루프’와 같은 청각 보조장치를 설치하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히어링 루프는 보청기와 인공와우 사용자를 위한 장치다. 이를 설치하면 특정 공간 안에서 사용자들이 잡음 없이 소리를 더 깨끗하게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보청기. [연합뉴스=AP통신]

보청기. [연합뉴스=AP통신]

미국에서는 장애인법(ADA)에 따라 일정 크기 이상의 시설 등에 청각 보조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별다른 의무 규정이 없다. 지난해 9월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이 장애인등편의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김철환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활동가는 “젊은 사람들도 이어폰을 많이 껴 소음성 난청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청각장애인 정책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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