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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성철의 미래를 묻다

대학 혁신 더 미룰 수 없어…기업가정신 장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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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초연결·초지식·초융합시대의 상아탑

신성철 전 KAIST 총장

신성철 전 KAIST 총장

인류는 지금 4차 산업혁명 물결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덮쳐 문명사적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화두를 처음 세상에 던진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혁명의 폭과 깊이와 속도는 역사상 전대미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 대변혁의 물결을 견디지 못하는 국가와 조직은 쇠망하게 될 것이다. 대학도 예외일 수 없다. 미래학자 토머스 프레이는 “2030년쯤이면 대학의 50% 이상이 붕괴할 것”으로 예측했다. 우리나라 대학 상황은 코앞에 닥친 인구 절벽으로 인해 좀 더 심각하다. 2018년 고등학교 졸업자 수가 대입 정원보다 적었고, 20년 후면 고교 졸업자 수가 대입 정원의 반도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혁신 바람 외면한 대학은 무너질것

인류 최초의 대학은 1088년 중세 시대에 설립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이다. 대학의 영어 표현 ‘유니버시티(university)’ 어원은 라틴어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로,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인데, 학자들과 학생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교육 위주의 중세 대학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9세기 교육 개혁가 빌헬름 폰 훔볼트가 대학은 지식을 가르칠 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혁신의 바람이 유럽과 서방 대학에 영향을 주었다. 혁신의 바람을 외면한 볼로냐 대학을 위시한 수많은 유럽 대학들은 사장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혁신의 바람을 타고 개혁한 케임브리지·옥스퍼드·하버드·MIT 등은 연구 선도대학으로 20세기 세계적 명성을 갖게 됐다.

스탠퍼드 출신, 4만개 기업 창업
매출 총액이 한국 GDP의 1.5배

온·오프라인 결합한 캠퍼스 대세
변화 외면한 대학은 사라질 운명

창의적 인력 양성이 미래 경쟁력
과학과 인문학의 칸막이 없애야

21세기 대학은 어떻게 혁신해야 사멸되지 않고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며 생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혜안을 얻기 위해서는 4차 산업혁명이 열어가는 21세기 메가트랜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KAIST 휴보랩에서 연구원들이 로봇개와 이족보행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1월 코스닥에 상장된 레인보우로보틱스가 휴보랩을 세운 오준호 교수의 회사다. 프리랜서 김성태

KAIST 휴보랩에서 연구원들이 로봇개와 이족보행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1월 코스닥에 상장된 레인보우로보틱스가 휴보랩을 세운 오준호 교수의 회사다. 프리랜서 김성태

첫째 ‘초연결’ 메가트렌드이다. 현재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8년 1인 1 스마트폰 시대에 진입했다. MZ 세대는 인터넷 사용자가 거의 100%에 이른다. 2050년 경이면 전 세계 인류가 서로 연결돼 광속도로 정보를 교환하는 초연결사회에 살게 될 것이다.

둘째, 인공지능(AI)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에 의한 ‘초지능’ 메가트렌드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경 AI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특이점(Singularity Point)’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다소 성급한 예측이란 비난도 있지만 AI 기술이 이미 다양한 산업에 적용되고 연구·의료·법·금융 등 여러 전문 분야에 응용되는 추세를 볼 때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공존은 예정된 미래이다.

셋째 ‘초융합’ 메가트렌드이다. 앞으로 새로운 발명과 발견,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주로 융복합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MIT 보고서에 의하면 미래 핵심기술 중 95%가 정보기술(IT)·생명공학(BT)·나노공학(NT)·인지과학 간의 융합에서 나오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이번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BT와 NT 융합의 결과다.

하이브리드 대학 구축해야

초연결·초지능·초융합 메가트랜드로 인한 문명사적 대변혁의 시대를 대비한 대학 혁신의 방향은 무엇일까. 첫째, 하이브리드(Hybrid) 대학을 지향해야 한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1997년 포브스에 “30년 정도 지나면 캠퍼스가 있는 물리적 대학(Physical University)은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캠퍼스가 없는 미네르바 대학이 주목을 받고,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물리적 대학이 세계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필자는 물리적 대학이 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제지간의 학문적 교류, 동료와 선후배 간의 만남을 통한 사회성 함양, 실험실습 교육, 학제간의 융복합 연구 및 거대과학 수행은 물리적 대학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연결 메가트렌드에 의한 디지털 사회 도래를 고려할 때, 물리적 대학에 온라인 디지털 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대면의 물리적 대학과 비대면 온라인 교육의 가상대학(Virtual University)이 병합된 소위 ‘하이브리드 대학’(hybrid university)이 미래 대학의 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예측한다. 이런 미래 대학을 모습을 선도적으로 추구하는 대학이 미국의 애리조나주립대학이다. 캠퍼스의 물리적 대학에 등록한 7만여 명 학생과 더불어 비대면의 가상대학에 등록한 비슷한 규모의 학생이 공존하는 대학이다. 전통적 물리적 대학의 역량을 잃지 않으면서 교육 능력은 배로 확장한 것이다.

시대별 대학의 역할

~18세기 교육
19~20세기 교육+연구
20~21세기 교육+연구+기술사업화

둘째, 학습의 극대화를 위한 혼합교육(Blended education)을 도입해야 한다. “오늘의 학생을 어제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내일을 망치는 일이다”는 교육학자 존 듀이의 경고에 새삼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 교육은 교수 주도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었다. 이래서는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진 창의적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학들이 전면적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면서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대학이 온라인 교육 인프라를 서둘러 채비했고 교수들은 꺼리던 온라인 강의에 익숙하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이런 교육의 새로운 변화가 10년은 앞당겨진 것이다.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는 새로운 변화가 가져다준 온라인 강의에 질의·토론 위주의 오프라인 교육이 혼합된 소위 ‘거꾸로 학습(flipped learning)’을 시행하면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강의실에서 교수 역할이 변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강의자가 아니라 수업 설계자로서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토론을 활성화하며, 또한 학문의 멘토로서 학생들의 부족한 지식을 보완하여 주는 것이다.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공존

셋째, AI로봇인 로보사피엔스와 공존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20대 80 사회’ 도래를 예측했다. 미래 사회에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모두 로보사피엔스가 맡게 될 것이므로 결코 과장된 예측이 아니다. 로보사피엔스의 정확한 반복기능과 표현, 정보 및 빅데이터 처리 능력, 기억력은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창의력·통찰력·지혜·감성은 로보사피엔스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정체성이다. 고로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첨단 과학기술 교육과 더불어 인문사회 및 예술 교육이 강조되어야 한다.

넷째, 초융합의 메가트렌드를 선도할 융합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학제 융합 교육이 필요한데, 전통적 학과 및 전공 중심의 두꺼운 교육장벽을 허무는 것이 급선무다. 학과의 벽을 없애고 ‘무학과 학부제도’를 운영해 성공한 대표적 대학이 미국의 하비머드대학과 올린 공과대학이다. 두 대학의 공통점은 무학과 교육 시스템을 통한 초학제 융합 교육과 기업현장의 문제 해결을 위한 팀 기반 학습이다. 이들 졸업생에 대한 기업의 선호도가 1, 2위를 다툴 정도로 매우 높다. 학문의 경계를 초월해 여러 세부 전공을 넘나드는 자신감과 협업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업가정신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20세기 중반까지 교육과 연구가 대학의 중요한 사명이었다. 그러나 개발된 연구결과를 경제적 가치 창출로 연결하는 기술사업화가 대학의 또 다른 사명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가정신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창업을 통해 국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할 뿐 아니라 기부를 통해 대학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창업지원 기구 설치해야

기업가정신 교육을 가장 먼저 도입한 대학이 미국의 스탠퍼드대학이다. 이 대학의 프레더릭 터만 교수가 20세기 중반부터 기술 창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업가정신 교육을 시작했다. 스탠퍼드대학 졸업생들이 창업한 기업이 지금까지 4만여 개에 이르고, 이들 기업이 창출하는 연 매출이 2조7억 달러다. 영국 국내총생산(GDP)에 맞먹고, 우리나라 GDP의 1.5배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다.

순수 학문의 상아탑 대학을 고집하던 칼텍·시카고대학 등 세계 명문대학들이 지금은 앞다퉈 기업가정신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이제 한국 대학들도 서둘러 전통적인 교육·연구 중심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기술사업화를 대학의 중요한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활성화를 위해 대학 내에 기업가정신 교육을 수행하고, 교수 및 학생들의 창업을 지원해주며, 기술이전을 전담하는 ‘창업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21세기 초연결·초지능·초융합의 메가트렌드를 기회 삼아 발 빠르게 혁신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은 그 존재가 더욱 빛날 것이다.

신성철

서울대 응용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이후 KAIST에서 고체물리학 석사를,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재료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성학 분야의 세계적 과학자로 나노자성체의 자구역전 동력학인 ‘나노스핀닉스’ 분야를 개척해 미국물리학회 석학회원으로도 선정됐다. DGIST 초대 및 2대 총장과 KAIST 최초 동문 총장을 역임했다.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대한민국 학술원상,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등을 수상했다.

신성철 전 KAIST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