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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으로 오케스트라 만드는 지휘자들 "자유롭고 평등하다"

중앙일보

입력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의 지휘자 이규서(가운데). [사진 이규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의 지휘자 이규서(가운데). [사진 이규서]

한국은 서울부터 제주까지 오케스트라가 촘촘한 나라다. 시립과 도립 오케스트라가 총 20개 이상. 1940년대 창단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을 필두로 대부분 1960~80년대에 창단한 교향악단이다.

제도권 오케스트라 대신 '스타트업'처럼 만드는 지휘자들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의 이규서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아드리엘 김 #새로운 프로그램과 방식으로 오케스트라 이끌어

이런 지형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젊은 지휘자들이 단원을 찾아 모으며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있다. 공연장을 빌려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면서 오케스트라마다 특정한 빛깔을 밀고 나가겠다 선언한다. 이들은 오케스트라를 왜 만들었고, 어떻게 자리 잡을까.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끌고 나가는 두 지휘자, 아드리엘 김(46)과 이규서(29)에게 물었다.

아드리엘 김은 코로나 19의 와중이던 지난해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을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입상한 후 한국에 돌아와 그가 한 일이다. “외국에는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마음을 합쳐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고유의 특성을 잘 살린 성공 사례가 많다. 한국에서도 도전해보고 싶어 실력 좋은 연주자들을 모았다.”

실제로 그렇다. 특히 유럽에는 음악가들끼리 뭉쳐 만든 오케스트라가 이미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1956년 창단한 영국의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와 지휘자 네빌 마리너, 1997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만든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1983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이반 피셔의 조합을 꼽을 수 있다. 혁신적 해석으로 논쟁의 중심에 선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는 32세이던 2004년에 ‘무지카 에테르나’를 만들었다. 당시 16세이던 바이올리니스트를 악장으로 앉힌 혁신적 오케스트라였고, 현재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악단 중 하나로 떠올랐다.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을 만든 지휘자 아드리엘 김. [사진 아드리엘 김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을 만든 지휘자 아드리엘 김. [사진 아드리엘 김

지휘자 이규서는 서울대 음대 2학년 때인 2014년에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 창단에 참여했다. 대학에서 오케스트라 수업을 함께 듣던 현악ㆍ관악 전공자들과 함께 만들었다. “무대에 목말랐다. 처음엔 그렇게 만들었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2020년에 서울시 지정 전문예술단체가 됐다.”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사단법인 형태다.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모기업이 없는, 스타트업에 가까운 오케스트라의 활동은 보다 자율적이다. 아드리엘 김은 “아무래도 의사 결정이 빠르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했다. 아드리엘 김과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앞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음악, 최근 유럽에서 각광받고 있는 네오 클래식 음악가인 막스 리히터의 작품을 연주할 계획이다. “행정 절차, 관할 단체의 승인 등을 신경 쓰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해볼 수 있다”고 했다.

비슷한 또래의 연주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만나 위계질서가 없다는 점도 새로운 오케스트라들의 특징이다. 이규서는“국공립 오케스트라는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해 견고한 조직이지만 그만큼 효율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소통이 경직될 수도 있다고 본다”며 “같은 세대가 모인 오케스트라는 친밀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유연한 관계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30대 초중반 단원이 주를 이룬다.

지휘자와 단원 사이의 소통 방식도 다르다. 이규서는 “우리 오케스트라에선 지휘자가 선생님이 아니다. 음악을 해석할 때 지시보다는 제안한다”고 했다. “또한 단원들의 음악적 실력에 대해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단원들이 독주할 때도 그 실력을 잘 살려주는 방향으로 진행하려 애쓴다”고 덧붙였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2018년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과 모차르트 협주곡을 3회 연주한 후 “네빌 마리너와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와 같은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악단”이라고 호평했다.

기존 오케스트라에 비해 정규 인원은 많지 않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유연하게 크기를 조정한다. [사진 이규서]

기존 오케스트라에 비해 정규 인원은 많지 않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유연하게 크기를 조정한다. [사진 이규서]

자유롭고 평등한 오케스트라들은 과감하다. 아드리엘 김은 “AI, 메타버스, NFT 같은 새로운 개념을 오케스트라 무대와 마케팅에 적극 도입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은 2018년부터 베토벤 교향곡 9곡, 피아노 협주곡 5곡을 모두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해 코로나 19로 마지막 공연이 취소되긴 했지만 독립적인 민간 악단의 용감한 시도였다. 이규서는 “모차르트ㆍ베토벤ㆍ슈만 같은 고전ㆍ낭만의 교향악 작곡가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악단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유에 대가도 따른다. 아드리엘 김은 “제도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들과 달리 단원 노조와의 행정적 절차, 임기 계약과 같은 일이 없다”며 “하지만 자립이 쉽지 않고 무엇보다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정적 재원이 없는 만큼 여러 시도를 하면서 비즈니스 모델까지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규서 역시 “티켓 판매 금액뿐 아니라 후원자 모집 시스템을 단단히 만들어보려 한다”고 했다.

이달에 두 오케스트라가 나란히 무대에 선다.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은 15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슈만 교향곡 4번, 첼로 협주곡(협연 이정현)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19일 오후 5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모차르트 교향곡 36번, 프리드리히 굴다의 첼로 협주곡(협연 심준호)을 공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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