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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아들 낳게 해주세요"…사진에 찍힌 절대권력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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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 서울 광화문. 1979년 11월 3일. [사진 김녕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 서울 광화문. 1979년 11월 3일. [사진 김녕만]

대통령을 피사체 삼기로 마음먹었을 때가 1979년이다. 그리고 40여 년. 윤보선 전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열 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카메라 렌즈에 담으며 그의 마음엔 ‘권력 무상’, 그리고 ‘인생 무상’의 잔상이 깊게 남았다.

사진작가 김녕만(73)이 대통령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20일까지 서울 청운동 류가헌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지난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내가 만난 대통령들 모두 청와대에 들어갈 땐 의욕이 넘쳤지만 나올 땐 쓸쓸했다”고 했다. “어떤 일이나 시작과 끝이 있게 마련이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물러가는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면서다.

백담사를 떠나 연희동 자택 앞에 도착한 전두환 전 대통령. 1990년 12월 30일. [사진 김녕만]

백담사를 떠나 연희동 자택 앞에 도착한 전두환 전 대통령. 1990년 12월 30일. [사진 김녕만]

1978년부터 2001년까지 동아일보 사진기자를 지낸 그는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행렬 인파를 촬영하면서 대통령 사진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엔 죄수복을 입은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찍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자리로 급전직하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권력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다시 되묻게 됐다.” 1994∼99년엔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촬영할 기회를 얻었다. 기자를 그만둔 뒤에도 선거 유세 현장과 기념식 등 공개된 장소의 대통령을 찍으러 다녔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향소와 장례 행렬도 그의 대통령 사진 중에 포함됐다.

그는 선배 사진기자이자 서라벌예대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이명동(1920∼2019) 선생에게 “유능한 사진가는 저널리스트 플러스 아티스트가 돼야 한다”고 배웠다. 그의 사진이 기록성과 감성을 함께 추구하게 된 이유다. 그의 대통령 사진 속엔 대통령이란 자리의 영광과 고뇌, 화려함과 고독, 빛과 그늘의 대비가 선명하다.

청와대에서 어린이날 이벤트로 제기차기를 보여주는 김영삼 전 대통령. 1997년 5월 5일. [사진 김녕만]

청와대에서 어린이날 이벤트로 제기차기를 보여주는 김영삼 전 대통령. 1997년 5월 5일. [사진 김녕만]

1997년 5월 5일 어린이날 이벤트를 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에서도 대통령 자리의 무게가 느껴진다. 당시는 비자금 관련 수사를 받고 있던 차남 김현철의 구속이 초읽기에 들어간 때였다.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들 앞에서 제기차기를 보여주는 대통령의 얼굴에선 어떻게든 미소를 지어보려 애쓰는 복잡한 심경이 읽힌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있는 사진 옆에는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같은 장소에 앉아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그는 똑같은 책상에 컴퓨터와 태극기 위치까지 똑같은 두 사진을 가리키며 “이렇게 보면 대통령이 5년 시한부의 책상 주인이었나 싶다”라고 말했다.

2012년 12월 18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 전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후보. [사진 김녕만]

2012년 12월 18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 전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후보. [사진 김녕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속성은 대통령의 삶에선 더욱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2012년 12월 18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 전날 저녁 박근혜 대통령후보는 광화문 광장에서 선거운동을 마무리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승리를 확신한 듯 표정은 더없이 밝았고, 주변 사람들 얼굴도 신이 나 보인다. 하지만 불과 4년 후인 2016년 겨울, 같은 장소에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비슷한 앵글에서 찍은 문재인 대통령의 두 사진도 극적인 반전의 역사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날, 비통한 표정의 문 대통령은 장의운영위원장으로서 운구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2017년 6월 6일 현충일엔 제19대 대통령으로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헌화를 마치고 결연한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2017년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헌화를 마치고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 김녕만]

2017년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헌화를 마치고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 김녕만]

그는 “앞으로도 또 누군가는 대통령이 돼 절대 권력과 절대 고독 사이에서 5년을 보내게 될 것”이라며 “퇴임 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간 대통령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은 노벨상까지 받았는데…. 그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전임 대통령이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풍토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서울역에서 대통령과 시민들과 만나는 모습을 사진 찍었는데, 그때 어떤 신혼부부가 ‘대통령님, 아들 좀 낳게 해주십시오’라며 악수를 청하더라”면서 “그렇게 대통령을 전지전능하게 생각하다 보니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원망과 비하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9월 11일 특별기 기내에서 기자들과 회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 김녕만]

1999년 9월 11일 특별기 기내에서 기자들과 회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 김녕만]

전시된 사진 중에는 그가 대통령 사진을 찍던 중 포착한 이색 사진도 하나 있다. 1998년 6월 백악관 만찬장에서 찍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사진이다.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초대 손님들과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백남준이 클린턴과 악수하려는 순간, 바지가 흘러내렸다.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아서 하체가 그대로 노출됐다. 단순 실수였는지, 클린턴의 르윈스키 성 스캔들을 풍자한 퍼포먼스였는지, 백남준은 작고하는 날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취재 순번이었던 기자가 아파서 내가 대신 만찬장에 갔다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대선 기간에도 대통령 후보들의 사진을 찍으러 유세 현장에 나갈 계획이다. 이들 중 한 명이 그의 카메라가 담아낸 열한 번째 대통령이 될 터. 유세 사진을 찍다 보면 누가 당선되겠다는 감이 오냐고 물었더니, 아니란 답이 돌아왔다. “선거 운동 중 후보들은 모두 에너지가 넘친다”면서 “꿈이 있으면 에너지가 생기는 모양”이라고 했다.

사진작가 김녕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진작가 김녕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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