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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예바도 '칵테일 귀부인'이었나···007 뺨친 러시아 도핑작전 [세계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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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네 번. 젖살이 통통한 만 15세 소녀 카밀라 발리예바(러시아)가 양팔을 쭉 올려 몸을 일자로 만들어 돈 회전수다. 발리예바는 지난 7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피겨 단체전 여자 싱글 프리 경기에서 남자 선수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쿼드러플(4회전) 점프에 성공했다. 그는 피겨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서 쿼드러플 점프를 성공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이 역사는 비공식 기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1일 대회 정례 브리핑에서 "발리예바가 이번 대회 전에 진행된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러시아 피겨 선수 카밀라 발리예바. AP=연합뉴스

러시아 피겨 선수 카밀라 발리예바. AP=연합뉴스

발리예바, 지난해 12월 러시아 대회에서 금지약물 양성  

지난해 12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선수권대회에서 채취한 소변 샘플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IOC를 대신해 올림픽에서 도핑 검사를 수행하는 단체인 국제검사기구(ITA)가 법률 검토를 거쳐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한 상태다. 이번 대회 피겨 여자 싱글 경기는 15일에 시작한다. CAS의 결정은 그 전에 나올 예정이라 발리예바의 출전 여부도 그때 가려진다. 발리예바가 이끌었던 러시아의 피겨 단체전 금메달 수상 여부는 추후 결정될 전망이다.

코메르산트와 RBC 등 러시아 매체는 발리예바의 도핑 샘플에서 검출된 성분이 협심증 치료제인 트리메타지딘일 수 있다고 전했다. 트리메타지딘은 협심증 치료에 쓰이는 약으로 운동선수의 신체적 효율을 높이는 효과가 인정돼 2014년 1월부터 도핑 금지약물로 지정됐다. 2006년 4월 26일생인 발리예바는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15세다. 앞길이 창창한 소녀가 운동선수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도핑 파문에 휘말렸다.

독일 다큐 "러시아 선수 99% 금지약물 복용" 

러시아의 도핑 스캔들은 현재진행형이다. 대대적인 파문은 지난 2014년 12월 독일 공영 방송인 ARD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됐다. ‘비밀 도핑 보고서-러시아는 어떻게 우승자를 배출했나’라는 제목의 다큐는 ‘러시아 올림픽 대표선수의 99%가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했다. 그 배후로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 산하 모스크바 실험실 소장이었던 그레고리 로드첸코프 박사가 지목됐다. 로드첸코프 박사는 "말도 안 된다. 실험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들"이라고 일축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반도핑기구 건물.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반도핑기구 건물. 로이터=연합뉴스

세계반도핑기구(WADA) 조사위원회는 2012년 1월부터 2015년 8월까지 RUSADA가 실시한 러시아 선수들의 모든 약물 검사 데이터를 검사했다. 그리고 2015년 11월 323쪽에 달하는 러시아 도핑 은폐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 2013년 모스크바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등 국제대회 전반에서 러시아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금지약물을 복용했으며 러시아 체육부가 이를 감독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로드첸코프 박사도 입장을 바꿨다. RUSADA 전 집행이사 니키타 카마예프와 RUSADA의 집행위원장을 지낸 뱌체슬라프 시녜프가 2016년 2월 몇 주 간격으로 갑작스럽게 숨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해 5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조직적으로 금지약물을 투여했다"고 고백했다.

금지약물 칵테일 암호 '귀부인'...연방보안 요원도 투입 

도핑 은폐 방식은 007시리즈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선수의 깨끗한 소변 샘플을 미리 받아 놓은 후, 여러 금지 약물과 술을 섞은 칵테일을 개발해 선수들에게 나눠줬다. 이 칵테일의 암호는 '귀부인'(Duchess)'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약물로 오염된 소변 샘플은 RUSADA 연구소에 보관됐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구 소련 KGB의 후신) 요원은 배관공으로 위장해 연구소에 들어가서는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 연구원들로부터 오염된 샘플을 받고, 대신 깨끗한 샘플을 바꿔치기 전달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러시아 국기 대신 오륜기를 앞에 두고 입장한 러시아 선수들.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러시아 국기 대신 오륜기를 앞에 두고 입장한 러시아 선수들. 로이터=연합뉴스

이 여파로 금지약물 복용 증거가 많았던 육상과 역도 종목의 러시아 선수들은 2016년 8월 리우 여름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2017년 12월 회원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는 아예 '러시아'란 이름을 박탈당했다. 선수들은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OAR)' 자격으로 출전했고, 러시아 국기, 러시아 국가 등의 사용이 금지됐다.

러시아의 광범위한 도핑 파문으로 '피겨 여왕' 김연아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소치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서 김연아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도 도핑 의심 대상자였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에는 WADA 독립위원회 도핑 의심 대상자 명단에도 오르면서 '메달 박탈'의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러시아 언론은 "소트니코바가 제출한 도핑 샘플 시험관에서 긁힌 자국이 발견됐는데 이는 샘플을 열었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IOC는 이듬해 11월 도핑 의혹을 기각했다.

러시아 도핑 주체는 국가, 냉전시대 잔재

2004년 윔블던에서 메이저 첫 우승을 기록한 러시아 테니스 스타 마리야 샤라포바. 2016년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약물 멜도니움 복용이 적발됐다. 멜도니움은 신진대사를 활성화하고 운동 후 회복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데 일부 러시아 선수들이 복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AP=연합뉴스

2004년 윔블던에서 메이저 첫 우승을 기록한 러시아 테니스 스타 마리야 샤라포바. 2016년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약물 멜도니움 복용이 적발됐다. 멜도니움은 신진대사를 활성화하고 운동 후 회복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데 일부 러시아 선수들이 복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AP=연합뉴스

러시아 도핑 역사는 소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WADA 초대 회장인 딕 파운드 IOC 위원은 러시아의 조직적인 도핑 은폐에 대해 "냉전시대의 오래된 잔재"라고 지적했다. 2014년 대한의사학회 의사학 저널에 실린 '스포츠 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 논문에 따르면 냉전시대에 올림픽이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면서 경기력 향상을 위해 선수들에게 약물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1960~70년대 동유럽 출신 여자 운동선수들은 유독 남성 같은 체격이 많았는데, 공산체제가 붕괴한 후 다량의 스테로이드 복용 때문으로 밝혀졌다. 미국 등 서방 국가에서도 금지약물 복용 사례는 종종 나온다. 도핑으로 몰락한 미국의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의 경우 도핑의 주체가 국가라는 것이다.

IOC는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 러시아에 내린 자격 정지 징계를 해제했다. 그런데 2019년 1월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테스트 결과가 또 조작됐다는 것이 발견돼 오는 12월까지 국가 자격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선수들은 지난해 7월 도쿄 여름올림픽,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도 개인 자격인 OAR 선수로 나오고 있다. 국기, 국가 사용도 못한다. 이 와중에 15세 스타 선수의 도핑 의혹이 또 불거졌다. 러시아 도핑을 조사한 캐나다의 리처드 맥라렌 변호사는 "러시아 체육부 장관은 소련 체제의 도핑 방식은 이제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도핑을 주도한) 그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도 없다"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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