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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동전 대체한 은, 명나라 중앙집권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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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화·지폐·은, 화폐로 본 중국

중국에서 은(銀)은 명나라 시대 들어 주요 화폐로 사용됐다. 하지만 은화로 만들지는 않았다. 당시 통용된 은괴 모습이다. [중앙포토]

중국에서 은(銀)은 명나라 시대 들어 주요 화폐로 사용됐다. 하지만 은화로 만들지는 않았다. 당시 통용된 은괴 모습이다. [중앙포토]

오래된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왜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동전이 많이 쓰인 것일까.

문명 초기 화폐가 발생할 때부터 금속이 이용됐고,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그리스·페르시아·중국 등 여러 문명권에서 주화(鑄貨)가 화폐의 주종이 되었다. 그런데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쓴 다른 문명권과 달리 중국에서는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동전이 근 2000년간 화폐경제의 주역 자리를 지켰다.

당·송 시대를 살펴보다가 이 의문을 처음 떠올릴 때는 해답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 중국의 경제발전 상황이 서민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일으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운하를 중심으로 치밀한 수로 체계를 갖춘 중국에서는 물류비가 낮은 덕분에 농민의 시장경제 참여가 활발하고 도시가 발달했다. 그래서 장거리 교역과 큰 거래에만 화폐가 쓰이던 다른 지역과 달리 서민의 일상생활에도 널리 쓰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송나라까지 서민경제 이끈 동전
화폐일원화로 중앙정부 파워 입증

교역 늘어나며 고액권 지폐 등장
원나라 거쳐 명 초기까지 통용돼

은 사용 늘며 시장으로 권력이동
국가통제 벗어난 지방세력 부상

그러나 이 설명이 당·송 시대에는 맞더라도 화폐 발생 이래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강력한 제국체제 때문에 중국 화폐에 법화(法貨, 법률에 의해 통용이 보장되는 화폐)의 성격이 강해서 금화나 은화처럼 내재적 가치를 가질 필요가 적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진 시황이 만들었다는 ‘일(鎰)’ 이후로는 중국에서 금화를 주조한 기록이 없다.

중국은 왜 금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진나라 반량전

진나라 반량전

중국 동전 중 가장 오랫동안 널리 쓰인 것이 진 시황의 반량전(半兩錢), 한 무제의 오수전(五銖錢)과 당 고조의 개원통보(開元通寶)였다. 긴 분권 시대를 끝내고 강한 중앙집권을 이루는 시기에 나온 것들이다. 네모진 구멍이 뚫린 동전의 표준 형태는 1000잎씩 끈으로 꿰미(貫)를 만들어 고액권처럼 쓰게 한 것이다. 화폐의 일원화를 위한 디자인이었다.

서민의 일상생활까지 화폐경제의 영역에 끌어넣은 동전은 송나라 때까지 중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준 훌륭한 제도였다. 그런데 경제발전에 따라 장거리 교역과 대규모 거래가 늘어나면서 그 효용성이 한계에 이르렀다. 꿰미 수준을 넘어서는 초고액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나라 오수전

한나라 오수전

그래서 지폐가 만들어진다. 민간에서 사용이 늘어나고 있던 어음을 국가제도로 만들었다. 송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을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따라 했고,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초기까지 교자(交子)·교초(交鈔)·보초(寶鈔) 등의 이름으로 시행됐다.

원나라의 남송 정복 후 남송에서 발행된 교자의 가치를 인정해준 것이 매우 흥미로운 조치였다. 독일 통일에서 마르크화 통합과 같은 성격의 이 조치는 정복의 목적이 파괴와 약탈 아닌 통합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남송이 장기간의 곤경 속에서도 안정된 화폐제도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나라는 화폐제도에서 교초에 큰 비중을 두었으나 쇠퇴 과정에서 공신력이 무너졌다. 만성적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남발한 결과였다. 원나라를 이어받은 명나라는 건국 후 내내 동전 체제와 지폐 체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은(銀)체제로 낙착됐다.

당나라 개원통보

당나라 개원통보

은은 공권력의 뒷받침 없이 내재적 가치를 가진 재물이다. 은이 화폐 역할을 한다는 것은 교환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실제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은이 중심화폐처럼 쓰였지만 은화가 주조된 일은 없고, 민간에서 은병(銀甁) 등 편리한 형태로 통용되는 것을 방치했을 뿐이다.

화폐의 기능은 교환의 수단, 가치측정의 기준, 가치보존의 수단, 세 가지가 중심이다. 화폐로서 은은 가치보존, 즉 축재의 수단으로서 기능이 특히 강하다. 중국의 전통적 정치사상에서 절대적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재력도 무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제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 은이 화폐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경제의 발전이 정치의 발전을 앞선 결과였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16세기 왜구는 해적 아닌 무역업자

1824년 산시성 핑야오에 선보인 중국 최초의 은행 일승창(日升昌) 내부. 전국에 지점을 두며 화폐 거래를 주도했다. [사진 바이두]

1824년 산시성 핑야오에 선보인 중국 최초의 은행 일승창(日升昌) 내부. 전국에 지점을 두며 화폐 거래를 주도했다. [사진 바이두]

16세기 초까지 은의 화폐 기능이 강화되면서 그 가치가 높아졌다. 같은 무게 금의 5분의 1 값으로 교환되어 서방(이슬람세계와 유럽)보다 두 배 가까운 우대를 받았다. 경제 법칙에 따라 외부의 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엽에 세계적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스페인이 정복한 아메리카에서 대형 은광들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545년 개발이 시작된 포토시 은광 한 곳의 생산량이 종래 전 세계 은 생산량보다 클 정도였다. 이 은의 상당량이 18세기 말까지 여러 경로를 거쳐 중국에 흘러들어갔다.

은의 대량 유입이 중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은 분명한 일인데 그 내용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파생된 문제 하나가 밝혀져 온 것이 왜구(倭寇)다. 왜구는 14세기 후반에 번성했으나 15세기 들어 잦아들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들어 왜구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16세기 ‘후기 왜구’는 14세기 ‘초기 왜구’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14세기 왜구는 이름 그대로 해적이었다. 약탈이 목적이었고 작은 배로 다닐 수 있는 한반도와 북중국 연안이 활동 무대였다. 그런데 16세기 왜구는 큰 배로 남중국해를 휘젓고 다니며 약탈보다 밀무역을 사업으로 삼았다. 규슈에 대개 본거지를 두었지만 남중국 연안의 섬들에도 기지를 두었고, 구성원도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 때문에 충족되지 못하는 교역의 수요를 활용한 밀무역 사업이었다.

이 밀무역이 ‘왜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일본의 은 생산 격증 때문이었다. 153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일본의 은 생산은 16세기 후반에 연 200톤 수준으로 당시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로 추정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 아메리카의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난다) 이 은을 은값이 좋은 중국으로 반입하는 사업을 벌인 것이 일본인과 중국인이 합작한 ‘왜구’였다. 은 수출을 통한 일본의 경제발전은 통일을 위한 동력이 되기도 했다.

수익성이 높은 은의 밀무역은 명나라 정치의 부패에도 큰 몫을 했다. 가정제(1521~66) 후기에는 그 이해관계가 조정까지 뒤흔들었다. 역대급 간신으로 꼽히는 엄숭(嚴嵩·1480~1567) 일당은 이 시기에 해적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재부와 권력을 쌓았다. 해적을 초무(招撫)한다는 명분으로 특정 세력을 옹호하면서 엄청난 뇌물을 받은 것이다.

조정의 권신들까지 연루되는 판에 지방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절강-복건-광동성의 동남 연안 지역 향신(鄕紳)은 밀무역 세력과의 유착을 통해 재력을 키웠다. 명나라 말기 민란이 천하를 휩쓸 때 이 지역이 안정을 지킨 것은 지역 향신의 실력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동남아 화교 세력이 일어난 발판

중국 동전을 모티브로 지은 선양시의 한 건물. [중앙포토]

중국 동전을 모티브로 지은 선양시의 한 건물. [중앙포토]

청나라가 들어선 뒤 남중국 지역의 저항이 수십 년간 계속된 데도 강력한 향신 세력의 존재에 큰 이유가 있었다. 오랑캐의 정복에 대한 반감에 남북 간의 큰 차이가 있었겠는가. 남중국의 향신 세력에게는 지켜야 할 기득권도 있고 저항할 힘도 있었다. 가장 끝까지 타이완에서 버틴 정성공(鄭成功) 집단은 해적 출신이었다.

송나라 때까지 자라난 남중국의 경제력은 명나라 때 은의 밀무역을 통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지방 세력으로 자라났고, 동남아시아의 화교세력도 이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청나라가 쇠퇴할 때 남중국 지방 세력은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으로 군사력의 주축이 됐고, 의화단의 난으로 촉발된 위기에서 자기 지역을 지키기 위해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맺었다. 화교 세력은 20세기 초에 손문(孫文)의 동맹회(同盟會)를 지원했고 20세기 말에는 개혁·개방 정책을 위한 외자 유치에 앞장섰다.

명나라 이후의 중국에서는 은을 매개로 한 민간의 경제 질서가 제국의 중앙집권에 종속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중앙정부가 그 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원심력으로 작용할 때도 있고 구심력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지금 중국에서 ‘연해(沿海)’ 지역의 우월한 조건에도 깊은 연원이 있어서 우격다짐으로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