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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개발중→실전 배치, 한 클릭 더 긴장 고조시킨 김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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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정은의 모자이크 정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함경북도 함흥 인근의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달 28일 관련 보도를 하며 공장 관계자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노동신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함경북도 함흥 인근의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달 28일 관련 보도를 하며 공장 관계자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노동신문]

지난달 28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소식 두 건을 각각 1면과 2면에 실었다. 김 위원장이 연포 남새(채소)온실 농장 건설 예정지(1면)와 군수공장(2면)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신문은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다.

통상 북한 매체들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의 활동 다음날 소개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는 전날(지난달 27일)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신문에 보도된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장소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함흥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파악됐다. 결국 북한이 해안에선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 2발을 쏘고, 김 위원장은 인근 농장과 군수공장으로 향한 셈이다.

김정은, 미사일 발사현장 인근 머물면서도 안나타나
미사일 발사한 날 인근 온실농장 예정지 찾아 존재 과시
공군비행장 활주로 걷어 내고 대규모 온실 건설 강조
빈번한 사진 모자이크 처리, 추가 대북 제재 의식했나
‘벼랑끝’ 직행 대신 여지 남겨 미국에 공넘기기 포석

노동신문은 “시험결과는 당 중앙위원회에 보고됐다”며 김 위원장이 발사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지난달 11일 662일 만에 미사일 발사현장을 찾은 김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장을 찾지 않은 배경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 김 위원장이 동해안 북부지역을 찾을 경우 사용하는 함흥 특각(별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숙소에서 김 위원장이 날아가는 미사일을 봤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모자이크 사진, 왜

무엇보다 이날 노동신문에서 눈길을 끄는 건 신문에 실린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사진이다. 신문은 김 위원장이 찾았다는 온실 농장의 대형 조감도를 실었다. 사진에는 농장의 ‘건설 규모’와 ‘주요 공사량’이 숫자로 담겼다. 그러면서도 주요 자재 소요량 부분은 알아볼 수 없도록 흐린 뒤 내보냈다. 또 김 위원장의 군수공장 방문 사진에선 공장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책임자들을 제재 대상으로 추가하고 있고, 농장에 필요한 자재 역시 제재 대상일 수 있어 감시를 피해 보려는 차원일 수 있다. 아픈 곳을 찔리지 않겠다는 얘기다.

북한이 이처럼 민감해할 수준이라면 아예 보도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북한 매체 역시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듯 전하는 게 아니다. 북한은 연이은 장거리미사일 발사로 위기가 고조됐던 2017년 7월 김 위원장의 신형 잠수함 건조현장 현지지도를 소개하면서도 잠수함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했다. 미국을 향한 공격위협을 과시하면서도 ‘감출 건 감추겠다’는 의도다. 뭔가 냄새만 피우면서 ‘알아서 판단하라’는 식의 모자이크 정치인 셈이다.

김정은의 의도는

북한은 지난달에만 7차례 미사일을 쐈다. 지난달 19일엔 당 정치국 회의를 열어 핵실험과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의 철회를 시사했다. 30일엔 사정거리 5000㎞로 추정되는 화성-12형 미사일을 쏘는 등 ‘넘지 말아야 할 선’으로 향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내내 미사일 발사 실험의 성격을 설명하며 “개발 중”에 방점을 둔 북한은 올해 들어선 “실전배치” 주장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미사일 발사 직후 관영 매체를 통해 “신형” “새로 개발한” “새로 조직된 연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올해엔 “최종시험”(극초음속미사일)이라거나 “검수”(열차발사 탄도미사일)“검열”(북한판 에이태큼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달 25일과 27일 각각 시험발사한 장거리순항미사일과 이스칸데르 미사일도 각각 “갱신”이라거나 “위력 확증”이라며 ‘이미 개발을 끝내고 성능 향상’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바뀌었다. 미사일의 성능 향상 과시 못지않게 관영 매체의 ‘설명’을 통한 위협 역시 한 단계 높이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사실을 일일이 공개하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선 건 대미 압박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단, 무더기 미사일 발사에도 김 위원장이 한 차례만 방문하며 거리를 두는 건 일종의 북·미 협상의 여지를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북한이 단번에 선을 넘지 않는다거나 벼랑 끝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이 당 정치국 회의에서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를 언급하며 “철회”가 아닌 “철회 검토를 지시”했다는 것도 당장 파국 선언이 아닌 다음 수를 보겠다는 메시지 발신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미사일 발사 현장 인근의 온실농장 예정지를 찾은 것 역시 ‘양자택일’의 주문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찾은 농장 예정지는 미사일 발사장소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공군기지다. 북한군이 특수부대원들을 태우고 저공 비행해 침투하는 ‘안둘’(AN-2)기를 수십 대 운영하는 곳이다. 그런데 북한 계획에 따르면 공군기지가 있던 자리에 주민을 위한 온실을 건설키로 했다. 북한은 2018년에도 함북 경성군의 차관수 비행군관학교 활주로를 없애고 그 자리에 남새 온실 농장을 건설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 1월 중국·러시아 국경을 폐쇄하며 셀프봉쇄에 나섰던 북한은 지난달 북·중 국경을 일부 열고 화물열차 운행을 시작했다. 이달 들어선 러시아와 국경 개방과 경제 협력(지원)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내부자원의 한계로 인해 오미크론의 확산 우려를 감수하는 모습이다. 대북제재가 진행형인 상황에선 북한이 중국 및 러시아와 국경을 일부 개방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김 위원장의 선택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일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결렬이라는 굴욕 속에서도 네 달 뒤 판문점에 나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도 누구보다 이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이중잣대 철회와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의 조건없는 대화 요구와 문재인 정부의 평화협정 체결 제안에 ‘선결조건’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날 좀 보라’는 식의 긴장 고조에 미국이 선뜻 응할지는 미지수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미국의 입장은 아직 명확하다. 또 중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와중에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의 신경전도 발등의 불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뺐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전선은 오히려 넓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추가 ‘행동’은 오히려 자신들의 ‘재고’만 소진하는 게 아닐까.

무대위서 가수 출신 이설주에 자리 양보한 ‘최고존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부인 이설주가 지난 1일 관람한 설명절 공연 출연진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부인 이설주가 지난 1일 관람한 설명절 공연 출연진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일 방송된 북한 TV엔 이상한 장면이 나왔다. 전날 설 명절을 맞아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진행한 공연의 끝부분에서다. 김 위원장은 이날 부인 이설주와 부부동반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그런데 공연을 마치고 출연진을 격려하는 장면에서 이설주가 남편인 김 위원장보다 앞서 악수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북한에서 수령으로 불리는 최고지도자는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신적인 존재”라며 “특히 남아선호 사상이 남아있는 북한에서 아무리 영부인이라고 해도 김 위원장에 앞서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상황은 이랬다. 공연장에 입장할 때 이설주는 김 위원장의 뒤를 따랐다. 잠시 멈춰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주석단 의자 뒤편으로 이동경로를 틀었고 종종걸음으로 김 위원장보다 자리에 먼저 다다랐다. 김 위원장은 이를 모른 채 성큼성큼 걸었고 넓은 통로를 독차지했다.

공연 내내 귓속말을 주고받은 김 위원장 부부는 공연이 끝나자 무대로 향했다. 출연진과 악수를 이어가던 김 위원장은 무대 중간쯤에서 멈춰섰다. 그러곤 이설주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왼손으로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웃음 띤 이설주가 이내 자리를 옮겨 ‘이상한’ 장면이 발생했다.

이설주는 북한의 예술 영재 교육기관인 금성학원 출신이다. 결혼 전 모란봉악단 가수로 설 명절 기념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날 등장한 음악인들이 선후배이자 동료였던 셈이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145일 만에 공개 석상에 등장한 부인(이설주)이 동료들을 보고 반가움을 표하는 모습을 보고 배려하는 차원일 수 있다”며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북한 체제의 속성상 이설주가 스스로 김 위원장을 앞서가는 건 불경죄에 해당하지만 김 위원장이 자리를 내어주는 건 북한 주민들에겐 오히려 친근한 이미지로 보여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박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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