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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누가 집권하든 정치 보복의 악순환 끊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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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석열, 혐의 적시 없이 ‘적폐 수사’ 부적절

야당 후보 사과 요구한 대통령도 과잉대응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9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문재인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하겠다”는 취지의 공언을 한 것은 부적절했다. 윤 후보는 “집권하면 전 정권 적폐 수사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해야죠”라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느냐”고 했다. 구체적 혐의도 적시하지 않고 ‘범죄’라고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윤 후보는 “대통령으로서 수사에 관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원래 대통령은 수사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했으니 혹여 집권하면 은밀한 방식으로 수사에 관여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윤 후보는 또 검찰총장 시절 최측근이었던 한동훈 검사장에 대해 “독립운동처럼 (정권 수사를) 해 온 사람”이라며 “유능하니 중요한 자리에 갈 거다. 서울중앙지검장 하면 안 되나”고 말했다. 이 또한 부적절한 발언이다. 집권하면 검찰 인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놓고 예고한 셈이나 다름없다.

물론 현 정부에서 ‘범죄’ 혐의가 짙은 권력형 게이트로 의심이 가는 사안이 있다. 특히 2018년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이나 원전 경제성 조작, 대통령 사위 특혜 취업 의혹과 맞물린 이스타항공 비자금 사건 등은 이미 관련자들이 수사나 재판을 받고 있다. 이는 ‘적폐청산’이 아니라 실정법 위반 혐의에 따른 정상적인 사법 절차다. 그런데 윤 후보가 거두절미하고 “민주당 정권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으니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이런 정상적인 수사·재판까지 ‘정치 보복’으로 덧씌워질 가능성이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윤 후보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 “노골적인 정치 보복을 선언했다”며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윤 후보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시작됐지만, 제1 야당 대선후보를 윽박지르며 사과를 요구한 대통령의 행태도 ‘선거 개입’이란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 정치사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권에 대해 ‘보복’으로 여겨질 만한 수사가 반복돼 왔다. 그 결과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이나 투옥 등 비극적 상황을 맞았고, 우리 사회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세력을 ‘적’으로 모는 분열과 증오의 정치가 일상화됐다. 그런데 윤 후보는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정권 적폐 수사’를 예고해 안 그래도 심각한 분열과 증오의 정치 구도를 심화시켰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누가 집권하든 야당의 협조를 얻어내야 국정을 끌고 갈 수 있다. 그러려면 정치 보복의 악습을 끊겠다고 공약해도 모자랄 판인데 보복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떠들어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건가. 이참에 여야 대선후보 전원이 ‘집권해도 정치 보복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할 필요가 있다.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보복과 갈등의 악순환을 멈추고, 통합과 화해의 길로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