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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외교 상도(常道) 벗어난 중국대사관의 항의성 입장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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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7일 중국 베이징 수도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경기에서 황대헌이 질주하고 있다. 황대헌은 레인 변경이 늦었다는 이유로 실격됐다. [뉴스1]

지난 7일 중국 베이징 수도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 경기에서 황대헌이 질주하고 있다. 황대헌은 레인 변경이 늦었다는 이유로 실격됐다. [뉴스1]

반중 정서 진화는커녕 악화 역효과  

언론·정치권 탓 앞서 원인 성찰해야

주한 중국대사관이 올림픽 쇼트트랙 판정 논란에 대한 입장문에서 “한국 언론과 정치인들이 반중 정서를 선동하고 있다”며 “엄중한 우려와 입장”을 표명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판정의 편파성을 지적한 언론 보도나 정치인 발언을 싸잡아 ‘선동’이라 비난한 것이다. 반중 정서에 대한 원인을 성찰하는 자세보다는 한국 언론과 정치권 탓을 하는 논조로 일관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대사관이 주장한 것처럼 판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일차적으론 심판진의 책임이다. 입장문이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나 체육 당국이 쇼트트랙 심판 판정에 개입했다는 증거나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선에서 결승까지의 매 단계마다 유력 우승후보들이 애매한 실격 판정으로 줄줄이 탈락하고, 하필이면 개최국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건 것에 대해 언론이 의문을 제기한 것을 과연 ‘선동’이란 단어로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쇼트트랙 종목 판정에 대한 의문은 직접 피해를 본 한국뿐 아니라 제3국 해외 언론까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대사관의 입장문은 해당 심판장의 풍부한 경력과 판정에 동원된 첨단 장비의 우수성을 거론하며 판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한 주장을 펼쳤다. 입장문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대사관 측이 우려를 표명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 어느 나라 대사관이든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오해, 왜곡 등의 이유로 자국에 대한 주재국 국민 감정이나 여론이 나빠지면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외교관 본연의 업무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규범이 있고 상도(常道)가 있다. 일차적으론 ‘외교 경로’라 일컬어지는 채널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 있다. 동시에 언론 기고나 공공 외교 활동 등을 통해 자국의 입장을 전파하는 수단이 있다. 하지만 비외교적 단어를 나열한 강경 논조의 입장문을 직접 발표해 마치 주재국 언론과 정치인을 훈계하거나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익히 보지 못했던 소통 방식이다. 외교 활동의 상궤(常軌)를 벗어난 언행을 일컬어 외교 결례라 한다.

주한 중국대사관은 이번 올림픽 이전에도 비슷한 논란을 일으킨 전례가 있다. 이번 입장문 또한 사회관계망(SNS) 등에 나타난 반응들로 보건대 반중 정서를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한·중 관계를 더욱 꼬이게 만든 셈이다. 한국인의 정서와 관행에 익숙한 주한 중국대사관의 노련한 외교관들이 이런 결과를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 과연 이번 입장문이 진정으로 한·중 우호의 훼손을 걱정한 끝에 나온 고심의 산물인지, 그보다는 본국 정부의 방침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발표한 문서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