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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용섭의 한반도평화워치

김정은에 속아 평화만 외친 5년, 얻은 게 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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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문재인 정부 대북 정책 결산

한용섭 우리국익가치연구회 대표·전 국방대 부총장

한용섭 우리국익가치연구회 대표·전 국방대 부총장

북한이 연일 미사일 시험을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위협’이나 ‘도발’이라는 말도 못하다가, 북한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유엔 안보리 결의에 위배되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종전선언만 해주면 북한을 북·미 대화로 이끌 수 있다”고 미국을 설득하다가, 북한이 종전선언에 대꾸조차 없이 미사일을 계속 쏘아대자 우리 정부는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국민은 “문재인 정부가 선전하던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결과는 무엇이고, 왜 북한이 평화는커녕 온갖 핵·미사일을 지속해서 개발하며, 한국을 인질 삼고 북·미 대결을 재연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중국 병법가 손자는 “상대방을 모르고 우리 편을 모르면 매번 전쟁에서 위태롭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고 했다. 문 정권의 대북 정책 실패는 북한을 제대로 모르고, 한국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만 바라보다 외교안보정책 대실패
정권 안보 위해 핵무기 필요한 북한은 비핵화 의지 없어
북한 핵·평화 논리 허구성 이기는 비핵·평화 논리 세우고
남·남 갈등 줄이고 한·미동맹 통해 핵·미사일 위기 극복해야

허망하게 끝난 한반도운전자론

한반도평화워치

한반도평화워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위적 국방보다 정권 합리화와 위업을 입증하기 위해 핵무기를 완성했다. 기회가 되면 미국 대통령과 일대일로 협상해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남북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핵 보유를 서둘렀다. 핵 완성 이후에는 핵·평화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북한이 핵을 완성함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안정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북핵을 반대하는 미국과 한국 보수 세력에 대해서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해치기 때문에 제거돼야 한다고 선전·선동했다. 비핵화를 하려면 대북 군사 위협과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 요구해왔다.

문 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 속에서도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운전자론을 들고 나왔다. 김 위원장의 “북한에 대한 군사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말에 속았든지, 오판했든지 간에 문 정권은 북·미 정상회담만 주선하면 북한이 비핵화할 것으로 믿었다.

한국의 한반도 운전자 역할은 북·미 정상회담 개최까지다. 문 대통령의 주선으로 김정은과 트럼프가 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부터 김정은이 대리운전자로 운전대를 잡았고, 문 대통령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문 정부는 비핵화를 트럼프에게 맡기고, 평화만 추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운전자는 대리운전자에게 목적지를 계속 상기시켜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야 한다. 운전대를 잡은 김정은에게 문 대통령은 부단히 남북, 북·미 회담의 근본 목적이 비핵화라는 걸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 그런데 김정은의 말만 믿고 문 정부는 북한이 지적하는 군사 위협과 적대시 정책을 없애주는 일에 분주했다.

김정은의 전략은 핵보유국 지도자로서 트럼프와 시진핑만 상대하는 것이었다. 한·미 이간과 미국 매파·비둘기파 이간엔 김영철을 이용하고, 남한 정부를 이류 파트너로 하대하기 위해 김여정을 활용했다. 이때부터 원래 목적인 비핵화는 실종되고, 남한 정부는 북한이 가리키는 군사 위협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어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서명했다.

위협을 위협이라 못 부르는 한국 정부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관철하려던 건 1991년부터 군사 위협이라고 주장한 한·미의 첨단 감시·정찰 능력을 제거하고, 서해 통항 질서를 관철해 서해 덕적도까지 해상 군사훈련을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 군은 『국방백서』에서 북한 핵·미사일이 한국에 위협이 된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딱 한 줄 “북핵·미사일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하며 한국을 빼고 한반도를 넣었다.

그 후 우리 군에서는 정치권 눈치만 보며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나 미사일 시험을 위협이나 도발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2019년 5월부터 시작된 북한의 미사일 시험을 처음부터 도발이라고 부르고 대응했다면 지금쯤 북한이 황당무계한 “이중잣대” 운운하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군은 1991년부터 위협이라고 여긴 북한 황해도에 전진 배치한 장사정포·방사포를 후방으로 이동시키거나 폐기하는 문제에 대해 9·19 군사합의에 포함하지도 못했다. 덕적도까지 서해 완충 구역을 설정한 것과 감시·정찰 금지구역을 넓게 설정한 건 누가 보아도 북한에 유리한 합의였다.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김정은은 트럼프에 대한 불신과 좌절감, 체면 손상, 문 대통령에 대한 분풀이로 미사일 시험을 계속했고, 2020년 6월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그때 평화 환상에 젖은 통일부 장관은 대북 정책을 비판하는 야당을 향해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평화를 외치는 자가 더 정의롭다”는 잠꼬대 같은 말을 했다.

문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 시험이나 남한 정부에 대해 온갖 욕설을 해도 대꾸도 못 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첫 항목인 대북 제재 완화를 위한 외교전에 나섰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해 아무런 실질 조치도 하지 않고 미사일만 시험 발사하는데 대통령이 미국·유럽연합(EU) 등을 방문하며 제재 해제를 요청하니 한국 외교는 국제 신뢰를 잃어갔다.

게다가 문 정부는 외국 신진 학자들을 초빙해 문제는 북한을 적대시하는 미국에 있지, 북한에 있는 게 아니라는 허상을 주입했다. 한국을 다녀간 외국 신진 전문가들은 “북한 핵·미사일이 위협이 아니라, 그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미국·한국의 국방부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비둘기파만 득세한 대북 협상

북한을 제대로 모르고 북한 당국자 말만 믿은 폐해가 계속 나타나고 있음에도 문 정부가 비본질적인 종전선언을 추진하던 중 북한 미사일 발사는 계속되고 있다. 확증편향의 폐해가 드러난 것이다.

손자는 “상대방은 몰라도 자신만 잘 알고 있으면 한번은 승리하고 한번은 패한다(不知彼知己 一勝一負)”고 했지만, 우리 대북 정책의 문제점은 우리 편끼리 갈라져 우리의 강·약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문 정부는 출범 때부터 김정은이 핵무기를 개발·실험하는 이유가 이명박·박근혜 적폐세력의 대북 강경 정책 탓이라고 했다. 김정일·김정은의 핵 개발의 본질과 전략을 잘 아는 전문가들을 무시했다.

통일연구원의 지난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고, 80%가 북핵은 한국에 위협이라고 답했다. 이를 억제하려면 한·미 동맹 강화가 필요하다(93%)고 말했다. 그런데도 문 정권은 여론을 무시하고 평화만 부르짖고 있다. 한·미 동맹 강화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미국이 한국인의 자주적인 생각을 가스라이팅(마비·조종)한다며, 동맹파를 안보 장사, 반민족파, 호전파라며 적대 세력으로 몰았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치권을 양분하며, 한·미 동맹을 약화한 결과, 대북 협상에서 한국의 협상력은 형편없다. 국민을 진보 대 보수, 동맹파 대 자주파, 핵과 재래식 무기의 연계파 대 불연계파, 평화파 대 안보파, 매파와 비둘기파를 분열시킨 결과다. 북한조차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리 군부가 싫어한다”며 북한에 있지도 않은 매파·비둘기파를 써먹으며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짜내어 왔는데, 정부는 감성적인 평화파만 데리고 남북 협상을 해 왔다. 그러니 대북 협상에서 제대로 할 말 하면서 국익을 챙겨올 수 있었겠는가.

김정은 심기보다 국익 앞세워야

이제 대북 정책은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지피지기(知彼知己) 전략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국민 안위를 김정은·김여정의 심기보다 몇백 배 중하게 여기며, 위협을 위협이라 부르면서 국민이 걱정하기 전에 안보를 살피는 국민군대로 거듭나야 한다.

국력과 국민적 지혜를 총결집해 북한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향해서도 당당하게 우리 실력과 잠재력을 발휘해 국익을 챙기는 대한민국을 국민은 원한다. 우리 강점을 의도적으로 비난하고 약화하려는 북한 전략에 말려들지 말고, 우리 강점을 활용해 북한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국익을 확보하는 지피지기 외교안보전략을 집행하는 정부가 돼야 한다.

북한 핵·평화 논리의 허구성을 극복하는 비핵·평화 논리를 세우고, 남·남 갈등을 해소해 국론을 결집하며, 한·미 동맹의 강점을 활용해 핵·미사일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하더라도 감성적 평화주의에 물들지 않고, 동포·억류자·국군포로 수십 명만이라도 데리고 오는, 평화 사랑을 실천하는 정부를 국민은 바란다.

한용섭 우리국익가치연구회 대표·전 국방대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