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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만 하면 '싸늘' 한·일 외교장관…이번엔 ‘사도광산’ 악재

중앙일보

입력

#1. 2020년 2월 15일(현지시간),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독일 뮌헨에서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고 “일본의 가시적이고 성의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하기로 한 만큼, 일본 역시 수출 규제를 철회하란 의미였다. 하지만 일본은 꿈쩍하지 않았다.

#2. 2021년 5월 5일엔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외상 간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다. 정 장관은 이 자리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다. 이에 모테기 외상은 한국 법원의 위안부·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언급하며 한국의 해결책 제시를 요구했다.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쏟아낸 채 회담은 20분 만에 끝났다.

#3. 정 장관과 모테기 외상은 2021년 9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재회했다. 한국 외교부는 “현안 해결 및 관계 발전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실제로도 말 그대로 의견만 나눴다. 정 장관은 위안부·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측 입장을 강조했고, 수출규제 철회를 요구했다. 외교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모테기 외상은 “일본 정부 입장을 설명했다”고 한다. 서로의 이견이 평행선을 달렸다는 의미다.

회담 때마다 터지는 악재…이번엔 '사도광산'  

역대 한·일 외교장관 회담은 이처럼 양국 우호 관계를 강화하는 기회가 아닌 이견이 공식화하는 갈등 표출의 장이 되곤 했다. 위안부·강제징용 피해 등 과거사 문제와 일본의 거듭된 독도 영유권 억지 주장 등 오래된 현안에 더해 문재인 정부에선 일본의 수출 규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배출이라는 새로운 현안이 관계 개선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이번엔 ‘사도광산’이라는 악재가 등장했다.

지난해 12월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G7 외교개발장관회의 당시 하야시 요시마사(왼쪽 둘째) 일본 외무상이 비틀스 스토리 박물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자 정의용(오른쪽 첫째) 외교부장관 박수를 치는 모습. [뉴스1]

지난해 12월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G7 외교개발장관회의 당시 하야시 요시마사(왼쪽 둘째) 일본 외무상이 비틀스 스토리 박물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자 정의용(오른쪽 첫째) 외교부장관 박수를 치는 모습. [뉴스1]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오는 13일 미국 호놀룰루에서 개최하는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때 별도의 한·일 외교장관 회담 일정을 조율 중이다. 만남이 성사된다면 지난해 11월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이 취임한 이후 약 3개월 만의 공식 회담이 된다. 양 장관은 지난해 12월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주요7국(G7) 외교·개발장관 회의에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이는 공식 회담이 아닌 ‘조우’에 가까웠다.

다만 양 장관의 회담이 이뤄진다 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일본이 지난달 28일 조선인 강제노역 피해 현장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하며 한·일 간 상호 악감정이 부풀어 있어서다. 실제 정 장관은 앞서 지난 3일 하야시 외무상과 첫 통화를 가졌지만, 사도광산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가열되며 정작 핵심 의제였던 북한의 탄도미사일 대응 논의는 뒷전으로 밀린 분위기다.

첫 회담부터 '사도광산 충돌' 우려 

일본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을 세계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를 추진키로 했다. [연합뉴스]

일본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을 세계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를 추진키로 했다. [연합뉴스]

당시 통화에서 정 장관이 “사도광산은 한국인의 강제노동이 있었던 곳”이라고 지적하자 하야시 외무상은 “한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한국 입장에선 하야시 외무상의 이같은 태도가 강제노역의 역사 자체를 부인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사도광산 문제를 둘러싼 양국 충돌이 본격화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양 장관은 그간 공식 회담은 물론 제대로 된 소통의 기회조차 갖지 않으며 상호 신뢰 관계가 조성돼 있지 않단 점도 문제다. 하야시 외무상은 지난해 11월 취임 후 곧장 미국·중국·인도 등 주요국 카운터파트와 취임 인사를 겸한 전화 통화를 가졌다. 하지만 통화 명단에 정 장관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일 외교장관 간 통화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하야시 외교의 우선순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외교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중재 나선 美…관계 개선은 난망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북한의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규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한미일 3국 공조를 강조하며, 오는 12일엔 미국 호놀룰루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북한의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규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한미일 3국 공조를 강조하며, 오는 12일엔 미국 호놀룰루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AP=연합뉴스]

이번 한·미·일 외교장관이 만나는 기회에 한·일 외교장관 회담 일정이 논의되는 것 역시 양국의 의지라기보다는 호스트 격인 미국의 바람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북한의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인 ‘동맹 규합’에 나선 상태다.

한·미·일 3국 공조는 특히 미국이 추구하는 인도·태평양 전략과 대북 공조의 핵심축이다. 한·일 갈등이 한·미·일 공조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재차 한·일 간 중재자 역할을 자처할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1월 출범 이후 줄곧 한·일 관계을 독려해왔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특히 일본은 오는 3월 9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임기 말 문재인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나설 유인을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임기 말 한·일 관계 개선 움직임이 자칫 대일 저자세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은 “미국은 한·일 관계 개선이 한·미·일 공조의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중재자 역할을 하겠지만, 현 상황에선 한·일 모두 양국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한·일 간 누적된 현안과 악재 관련해서도 역시 한국의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야 본격적인 협상과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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