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 자존심 접고 극찬...그런 원효는 왜 참선 대신 춤췄나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2022.02.09 05:00

업데이트 2022.02.0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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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더러운 게 둘이 아니다. 일심(一心)이다.”

#풍경1

원효 대사가 출가 전 속가(俗家)에 있을 때
성은 설씨(薛氏)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설이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효의 아들 이름은 설총(薛聰)입니다.

원효 대사의 출가 전 성씨는 설씨였다. 그래서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 난 아들의 이름이 설총이 됐다. [중앙포토]

원효 대사의 출가 전 성씨는 설씨였다. 그래서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 난 아들의 이름이 설총이 됐다. [중앙포토]

(下)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원효 대사의 파계

『삼국유사』에는 원효 스님과 요석 공주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물론 당시의 신분은 출가한 승려였습니다.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하늘 버틸 기둥을 다듬으려네.”

경주 사람들은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태종 무열왕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당시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습니다.
무열왕의 세 딸 중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요석 공주”라 불렀습니다.
공주는 일찍이 김흠운이란 화랑과 혼인을 했으나,
남편이 백제의 조천성(助川城, 지금의 옥천)을 공략하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의 노래를 들은 무열왕이
“대사가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 게다.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월정교. 원효 당시 이 다리 앞에 문천교가 있었다. 지금도 물 속에 문천교를 세운 흔적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경주에 있는 월정교. 원효 당시 이 다리 앞에 문천교가 있었다. 지금도 물 속에 문천교를 세운 흔적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무열왕의 명을 받은 궁궐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나섰습니다.
원효는 마침 경주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궁의 관리를 보자 원효는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졌습니다.
관리들은 옷이 흠뻑 젖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말리던 원효는
공주를 만나 요석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요석 공주에게 태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설총입니다.

저는 『삼국유사』의 기록 이면에
숨은 사연이 상당히 있을 거라 추측됩니다.
당시 원효는 과연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만날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인터뷰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이 제한적이니
나머지는 물음표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경주에 있었던 대사찰 황룡사의 복원 모형. 올라서면 경주 시내가 훤히 보였다는 황룡사 9층 목탑도 보인다. [사진 경주시]

경주에 있었던 대사찰 황룡사의 복원 모형. 올라서면 경주 시내가 훤히 보였다는 황룡사 9층 목탑도 보인다. [사진 경주시]

설총은 어려서부터 영리해
경서(經書)와 학문에 널리 통달했다고 합니다.
신라의 이두식 표기도 집대성했습니다.
장미(간신)와 할미꽃(충신)의 비유를 들며
신문왕에게 직언을 한 설총의 ‘화왕계’가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는 ‘신라 10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습니다.
원효의 말처럼 하늘을 받치는 대들보가 된 셈입니다.

#풍경2

신라 사람들은 원효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머리 깎고 출가한 스님이 계율을 어기고
여자를 만나 자식까지 낳았으니
그를 ‘실패한 스님’으로 보는 이들도 많았을 터입니다.

그렇지만 원효는 그리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에
무덤에서 “무덤과 땅막이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이전과 다른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효 스님은 당나라 유학길에서 의상 스님과 함께 무덤에서 밤을 보내며 깨달음의 계기를 맞았다. [중앙포토]

원효 스님은 당나라 유학길에서 의상 스님과 함께 무덤에서 밤을 보내며 깨달음의 계기를 맞았다. [중앙포토]

의상과 헤어진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에 머물며 불교의 경전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의 눈’을 갖춘 그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깨달음의 세계를 기록해 놓은 불교 경전을
깨달은 안목으로 더 쉽게 풀어쓰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란 불교 경전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신라땅에서 읽히고 있었지만,
누가 썼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금강(金剛)’은 너무도 단단해서 부서지지 않는 걸 뜻합니다.
부서지지도, 무너지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삼매(三昧)’는 그 진리 안에 머물 때의 본질적 고요를 말합니다.
파도가 아무리 높이 치솟으며 부서져도
바다 자체는 본질적으로 고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원효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무지하게 난해한 책으로 통합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깨닫지 않은 눈으로 풀려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원효는 그 책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 주석서의 이름은 처음에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였습니다.

원효 스님이 주석을 단 '금강삼매경론'의 표지.

원효 스님이 주석을 단 '금강삼매경론'의 표지.

당시에는 신라 말을 모르는 중국 사람과
중국 말을 모르는 신라 사람의 즉자적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한문을 통해서입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한자로 썼습니다.
중국인은 별도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자기 나라말을 읽듯이 바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중국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책을 본 중국인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원효의 수려한 명문장에 감탄했고,
그보다 더 빼어난 깨달음의 안목을 극찬했습니다.

급기야 부처의 경지에 비교되는 보살의 저서에나 붙이는
‘론(論)’자를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에 붙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인은 원효의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에서
‘소(疏)’자를 떼고 ‘론(論)’자를 붙여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 불렀습니다.
그건 극찬 중에서도 최고의 극찬이었습니다.

원효 스님이 저술한 '발심수행장'. 출가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썼다. [중앙포토]

원효 스님이 저술한 '발심수행장'. 출가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썼다. [중앙포토]

세상의 중심이 중국이라 여기는 중국인들이
기꺼이 자존심을 꺾고서 극찬할 정도였으니
원효의 안목과 내공은 실로 대단한 경지였습니다.

분황사로 돌아온 원효는
무려 99부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안목도 독보적이었지만,
그 양만 해도 초인적 분량이었습니다.
이들 저서는 고려 중엽까지도 대부분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거의 없어졌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20부 22권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이 책들만 해도 원효의 깊이를 헤아리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풍경3

경주 분황사에서 불교의 온갖 경전을
깨달음의 눈으로 풀어내던 원효는
불현듯 붓을 꺾었습니다.
그리고 분황사를 떠나 저잣거리로 들어갔습니다.

원효 스님은 경주 분황사에서 불교 경전에 대한 방대한 해석 작업을 했다. 경주 분황사에 있는 전탑이다. [중앙포토]

원효 스님은 경주 분황사에서 불교 경전에 대한 방대한 해석 작업을 했다. 경주 분황사에 있는 전탑이다. [중앙포토]

원효는 방대한 불교 경전을 명쾌한 안목으로
충분히 풀어냈습니다.
이제 그는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원효는 밝음과 어두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천민의 마을이나 주막, 기생집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을 만날 뿐이었습니다.

시장통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습니다.
그런 원효를 전쟁고아들은 따라다니고,
원효는 또 그들에게 쉬운 말 몇 마디로
불교의 심장을 전했을 터입니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염하도록 했습니다.
그걸 통해 그들에게 ‘일심(一心)’을 전하려 했습니다.

#풍경4

원효의 행동은
출가자로서 너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독신 수도승이 여자를 만나
아이까지 낳았으니 말입니다.

원효는 자식을 숨기고 “으흠”하고 뒷짐 진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파계승’임을 세상에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승복도 벗었습니다.
세속의 서민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을 가리켜 “소성 거사(小姓 居士)”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그리고 원효는 민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주에 있던 대사찰 황룡사의 절터다. 바닥에는 당시에 있던 전각의 주춧돌이 보인다. [사진 경주시]

경주에 있던 대사찰 황룡사의 절터다. 바닥에는 당시에 있던 전각의 주춧돌이 보인다. [사진 경주시]

당시 신라 불교는 귀족 중심의 불교였습니다.
우리말은 있었지만, 우리 글자는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나마 한자를 빌려 이두식 표기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교 경전과 교리를
일반 백성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로만 돼 있던 기독교 성경을
평신도들이 읽을 수 없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원효 당시는 삼국이 통일 전쟁을 거듭하며
숱한 전쟁고아와 과부, 전사자들이 속출하던 시대였습니다.
원효는 어려운 불교의 핵심을 쉽게 간추려
글을 모르는 민중에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위로, 시대의 위로,
생사를 넘어설 수 있는 진리의 나침반을 건넸습니다.

그 방식도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놀던 광대에게서
큼지막한 박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는 그 박을 두드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춤이 ‘무애춤’이고, 그 노래가 ‘무애가’입니다.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교의 핵심 사상을 민중에게 전했다.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교의 핵심 사상을 민중에게 전했다.

무애(無碍),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원효는 그렇게 걸림 없는 춤, 걸림 없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게 원효의 삶이었습니다.

초기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깨닫기 전에는 번뇌가 그물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그 그물에 걸립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거기에 갇혀서 허우적거립니다.

원효는 달랐습니다.
번뇌 자체가 빈 몸임을 깨쳤습니다.
그물도 빈 그물임을 깨쳤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바람이 됩니다.
더이상 그물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이 됩니다.
무애의 삶, 그게 원효의 삶이었습니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그리고 설총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는 경북 경산의 반룡사.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그리고 설총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는 경북 경산의 반룡사.

#풍경5

원효의 사상은 한 마디로 ‘일심(一心)’입니다.

세상 모든 마음이 일심(一心)에서 나오고,
다시 일심(一心)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효는 그걸 “화쟁(和諍)”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절실한 정신입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를 고수하며 진영을 쪼개고 있습니다.
나의 진영이 하는 모든 일은 선(善),
상대방 진영이 하는 모든 일은 악(惡)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소통이 없습니다.
대화와 타협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원효는 말합니다.
소통하라고,
회통(會通)하라고,
진영으로 쪼개지기 전에 우리 민족이 공유했던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화쟁(和諍)하라고 말합니다.

경주 황룡사는 남아 있는 전각의 주춧돌만 봐도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경주시]

경주 황룡사는 남아 있는 전각의 주춧돌만 봐도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경주시]

원효는 신문왕 6년(686년)에 경주 혈사(穴寺)에서 입적했습니다.
당시 세수는 70세였습니다.

신라 조정은 서당화상탑비를 세우고,
비문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칭송했습니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로 갈라져 싸우다
삼국통일을 이룬 당대에
가장 절실한 시대정신은 ‘화쟁(和諍)’이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2022년 지금 이 땅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 정신입니다.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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