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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실려 육사 쫓겨난 그의 반전…집단소송 변호사 됐다 [별★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피해는 점점 커지는데 그들에겐 싸울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소송을 포기하는 거죠…”
집단 피해를 보았지만 여러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그는 ‘제소의 체념’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그의 사무실엔 공동소송을 대리하기 위한 각종 소장이 쌓여있다. 코오롱 인보사 사태부터 호날두 노쇼 사건을 거쳐 최근 오스템 임플란트 횡령피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집단 피해’사건이 그의 손을 거쳤다. 수많은 원고를 만나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예민한 사건들이다. 그는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고비를 넘은 뒤 밀려오는 뿌듯함에 놓지 못하고 있다”며 웃었다. ‘공동소송 전문변호사’라 불리는 엄태섭(40)씨를 ‘별★터뷰’가 만났다.

‘별’ 달고 싶던 육사 생도

제복입은 모습을 동경했던 엄씨는 육군 장성을 꿈꾸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진 본인 제공

제복입은 모습을 동경했던 엄씨는 육군 장성을 꿈꾸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진 본인 제공

처음부터 법조인을 꿈꾼 건 아니었다. 제복 입은 모습을 동경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별을 달겠다”는 당찬 포부는 2003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휴가 중 동기와의 식사자리에서 술을 곁들인 게 화근이었다. 일행 중 한명이 외국인과 시비가 붙었고 경찰이 출동하면서 일이 커졌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음주가 문제였다. 생도의 음주는 영외에서도 금지였다. 퇴교 처분이 내려졌고 트럭에 실려 각 부대로 흩어졌다.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대체하는 동안에도 ‘사실상의 징계’는 이어졌다. 월급은 하사계급의 10분의 1수준인 7만3900원뿐이었다. 군은 장기복무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퇴직금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엄씨는 제대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는 틈틈이 학위 취득 등에 힘썼다고 한다. 사진 본인 제공

엄씨는 제대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는 틈틈이 학위 취득 등에 힘썼다고 한다. 사진 본인 제공

2010년 제대 후 온갖 일터를 전전하던 그에게 새 목표가 생겼다. 인권위에 있던 지인으로부터 군 복무 중 겪은 불합리한 대우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다. 한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국방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소멸시효 탓에 퇴직금만 받게 됐지만, 그는 “변호사가 돼 권리를 되찾게 돕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된 그는 2016년 돌연 국회의원 보좌관에 도전했다. 새로운 곳에서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과 한때 꿈꿨던 공직에 대한 미련이 컸다고 한다. 군 복무 중 발병한 희귀질환으로 세상을 뜬 장병을 위해 군인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데 힘을 보탰다. 증명책임을 당사자가 아닌 국가로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서는 곳이 달라졌지만 “다른 이를 위한 대리전에 나서겠다”는 마음가짐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KT 사태에서 시작한 ‘공동소송’

법무법인 오킴스 소속 엄태섭 변호사(왼쪽에서 4번째)가 2019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케이주(인보사)' 피해 환자들의 공동 손해배상청구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법무법인 오킴스 소속 엄태섭 변호사(왼쪽에서 4번째)가 2019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케이주(인보사)' 피해 환자들의 공동 손해배상청구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2018년 말 또 하나의 사건이 변호사로 돌아온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KT 아현지사에서 불이 나면서 통신 대란이 벌어졌다. 엄씨 동생을 비롯한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었다. 엄씨는 소상공인연합회를 도와 발 벗고 뛰었지만, 예상보다 적은 배상안에 고개를 떨궜다. 2달 뒤 코오롱 인보사 사태가 터졌다. 바이오신약의 핵심 세포가 바뀌었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피해자가 속출했다. 피해자는 많았지만, 개별대응이 어렵다는 점에서 KT사태와 비슷했다. 엄씨는 그때의 아픔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피해자를 모아 공동소송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 1000여명을 모아 코오롱생명과학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오스템임플란트 횡령사고 피해주주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오킴스의 엄태섭 변호사(왼쪽)가 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엄 변호사는 "오스템임플란트 및 그 임원들, 대주주를 상대로 자본시장법상 책임을, 회계법인을 상대로 외감법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오스템임플란트 횡령사고 피해주주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오킴스의 엄태섭 변호사(왼쪽)가 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엄 변호사는 "오스템임플란트 및 그 임원들, 대주주를 상대로 자본시장법상 책임을, 회계법인을 상대로 외감법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공동소송을 거듭할수록 노하우가 생겼다. 2020년부턴 온라인 사이트 ‘집단소송닷컴’을 운영하고 있다. 사안별로 ‘승소 가능성’과 ‘승소 후 집행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적은 뒤 피해자의 참여를 끌어낸다. 항상 소송을 고집하진 않는다. 스카이에듀가 온라인 강의를 듣고 수도권 대학에 입학하면 수강료를 돌려준다고 약속하고도 1년 가까이 환급을 미루면서 논란이 일었다. 소송으로 이어지면 학생들의 고충이 커질 우려가 되는 사안이었다. 엄씨는 환급 채무 불이행을 지적하는 한편 회사 측을 설득해 분쟁을 조기에 마무리했다.

“피해자 권리 위해 집단소송 필요”

엄씨는 육사에서 퇴교한 후에도 여전히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2018년 스파르탄레이스 대회에 출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모습. 사진 리복

엄씨는 육사에서 퇴교한 후에도 여전히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2018년 스파르탄레이스 대회에 출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모습. 사진 리복

최근 엄씨는 특별한 시스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쟁점과 요건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 나 홀로 소송을 가이드해주는 시스템이다. 어떻게 피해자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지 동료와 함께 고민하던 시간의 결과물이다. “혼자 소송을 준비하는 이들이 민사소송의 70%라고 하더라고요. 변호사들이 손을 잘 못 대고 있는 사각지대죠. 돈과 시간이 부족해 권리를 되찾지 못하는 사람이 최대한 줄어들게 돕고 싶어요.” 언젠간 집단소송이 도입돼 피해자의 권리가 더욱 보장받았으면 하는 10년 차 변호사의 간절한 소망이다.

별터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별터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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