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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재의 사람사진

“내 1시간은 당신의 1시간" 타임뱅크 설립자 에드거 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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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권혁재의 사람사진/에드거 칸 박사

권혁재의 사람사진/에드거 칸 박사

“에드거 칸 타임뱅크 창립자가 타계하셨다네.”
지난달 24일, 4년 전 그를 취재했던 기자가 전해온 문자 메시지다.

영국 타임뱅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1시간 타임 크레딧 지폐(1 TIME CREDIT) .

영국 타임뱅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1시간 타임 크레딧 지폐(1 TIME CREDIT) .

메시지를 보자마자 2018년 취재 기록을 찾아봤다.
‘이웃을 위해 1시간 일하면 1 크레딧(신용점수)을 쌓는다.
그 크레딧만큼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에는 차별을 두지 않고,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숙달된 의사든, 코흘리개 꼬마든 1시간 노동은 동일한 값어치다.
이는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완하는 ‘제2의 경제’다.
돈보다 사랑·헌신·우애·돌봄·양육 등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한다.
어린이·노인·장애인·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를 껴안는다.’

그날 그가 들려준 건 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타임뱅크 개념이
현실에서 가능할지 의구심도 들었다.
그는 미심쩍어하는 기자에게
“실제 혈액은행과 흡사하다”고 했다.

시계, 반지, 손수건, 펜, 수첩 등 그가 지닌 모든 것에 오랜 시간이 배어 있다.

시계, 반지, 손수건, 펜, 수첩 등 그가 지닌 모든 것에 오랜 시간이 배어 있다.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그가 이러한
사회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뭘까?
“젊은 변호사 시절부터 흑인·인디언 등의
인권신장·빈곤퇴치를 위해 일했죠.
그러다 몸에 탈이 났어요.
심장의 60%가 망가졌죠.
그때 저를 돌보는 간호사·자원봉사자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들은 나를 위해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무엇을 했어요.
그 무엇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방안에 착안했어요.”

이는 경제적 이익을 따지는
경제학자 입장에선 고개를 가로저을 이야기다.
그렇지만 ‘돈만 아니라 자원봉사의 정신적인
성취감도 이익이 된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에드거 칸 박사가 들고 다니는 가방.

에드거 칸 박사가 들고 다니는 가방.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곳이 있다.
김요나단 신부가 운영하는 경북 구미시 ‘사랑 고리’다.
여기서는 봉사 혹은 노동 1시간당
‘사랑 고리’ 증표를 한 개씩 나눠준다.
‘사랑 고리’가 지역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실제 40개 국가에
1700여 개 타임뱅크가 운영 중이다.

시간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고 지난 1월 24일 하늘로 떠난 에드거 칸 박사의 명복을 빕니다.

시간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고 지난 1월 24일 하늘로 떠난 에드거 칸 박사의 명복을 빕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람의 가치는 같다’며
시간 나눔을 실천한 에드거 칸 박사,
오늘의 시간에 그는 없지만,
그가 남긴 나눔의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