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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뇌출혈 분간 어려운 만취자…자칫하면 의사도 죽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90)

술에 취한 중학생을 진료한 적이 있다. 섬에서 근무할 때였다. 학생 하나가 혼수상태로 보건소에 업혀 들어왔다. 친구들과 몰래 술을 마시다 사고가 발생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머리를 다쳤다고. 일단 술로 인한 인사불성 상태로 보이는데, 아무튼 뇌출혈을 감별해야 했다. 취한 사람들은 원래 다치는 일도 많고, 뇌출혈이 일어나는 경우도 잦으니까.

두부 CT 검사를 해야 했다. 증상만으로 만취와 뇌출혈을 구분하는 건 히포크라테스 할아버지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시골 보건소에 CT 기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필 늦은 새벽 시간이라 섬에서 육지로 나가는 교통편도 여의치 않았다. “뇌출혈이 있으면 위험합니다.” 여러 차례 경고해봤지만, 보호자는 단순히 취한 게 아니겠냐며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쳤다. 진퇴양난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학생의 팔에 링거를 꽂아두고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린 학생의 소중한 생명과 어렵게 딴 내 의사면허를, 하늘이시여 부디 지켜주소서.’ 행여나 뇌출혈이 있으면 아이도 죽고 의사도 죽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 괜찮겠죠?” 보호자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걱정되면 어떻게든 아이를 큰 병원으로 데리고 나가셔야지,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지?’

응급실에서 취객들은 골치 아픈 존재다. 특히 정신을 못차리는 이유가 술 때문인지 뇌출혈 때문인지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응급실에서 취객들은 골치 아픈 존재다. 특히 정신을 못차리는 이유가 술 때문인지 뇌출혈 때문인지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전공의 시절에도 주취자를 많이 보았다. 그들은 종종 나를 시험에 들게 했는데, 한번은 뇌출혈을 놓쳤던 적도 있다. 인사불성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였다. 의식이 명료하지 않아 CT 검사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의사고 간호사고 누군가 접근하기만 하면 환자가 발로 걷어차 버렸다. 도무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막막했다. 보호자도 문제였다. 술 마신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링거나 빨리 놓아주라고 화를 냈다. “아니 링거 주사는 무슨 수로 놓습니까? 다들 얻어맞기 바쁜 거 안 보입니까?” 할 수 없이 수면 마취로 환자를 완전히 재운 후 CT 검사를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다만 조금 위험했기에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검사를 위해 수면 마취를 할 건데, 혹시 너무 깊이 잠들면 기관삽관과 인공호흡기를 달 수도 있어요.” 하마터면 한 대 맞을 뻔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환자는 한나절 푹 자고 일어나더니 그제야 술에서 좀 깨어났다. 드디어 협조가 돼서 두부 CT 촬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최악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선명한 뇌출혈 소견이 드러났다. 뒤늦게 부랴부랴 응급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당연히 보호자는 또 한 번 길길이 날뛰었다. 뇌출혈을 단순 음주로 오인해서 치료가 늦어졌으니 책임지라고 했다. 의료사고라며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혹시 이대로 환자가 죽으면 나는 감옥에 끌려가나? 이제 겨우 의사가 됐다고 어머니가 많이 좋아하셨는데…’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환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원인이 술이 아니라 뇌출혈 때문임을 족집게처럼 짚어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면 의사가 아니라 점쟁이일 테지.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링거나 놔달라는 보호자는 말로든 힘으로든 억눌러야 했다. 무조건 두부 CT를 검사해 뇌출혈을 찾아내고 즉시 응급수술까지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쉬운 일일까? CT는 본디 환자가 움직이면 검사가 불가능하다. 협조가 필수라서 이런 경우는 수면 마취제를 써야 한다. 그럼 마취는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 여럿이 달려들어 환자를 힘으로 제압한 후 억지로 주사를 꽂으면 되기야 될 테지. 그런데 그 광경이 과연 사람들 눈에 어찌 보일지 의문이다.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수면 마취의 부작용이다. 목에 튜브를 꽂아 인공호흡기를 연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술 취한 사람의 뇌출혈 여부 확인을 위한 대가라기엔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이럴 때는 위험과 이득을 보호자와 충분히 상의하며 최선의 길을 함께 찾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보호자는 전혀 내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 이후 나는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보호자가 결과론으로 나를 옭아맸기 때문이다. 다행히 환자의 수술 결과가 좋았기에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혹시나 환자가 잘 못 되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일하고 있진 못했을 테지.

주취자의 진료의 어려움을 길게도 설명했는데, 그만큼 응급실에서 취객이 골치 아프고 보기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겪은 사건을 얘기하면,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쉽게 얘기하곤 하더라. “뇌출혈 환자를 단순 주취자로 오인한 의사 때문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의료사고”라고. 속상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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