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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49화. 창세신화

중앙일보

입력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랜 옛날, 하늘도 땅도 없는 세상에 한 거인이 있었습니다. 마고라는 이름의 그 거인은 9만 필의 천으로 옷을 지어도 몸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고 하죠. 한가로이 잠을 자던 거인은 어느 날 일어나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거대한 마고에게 바다조차 장해물은 아니었대요. 마고는 세상을 떠돌면서 다양한 일을 합니다. 치마폭에 흙을 싸서 나르는가 하면, 커다란 바위를 굴리고, 곳곳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기도 했죠. 그때마다 세상에는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치마폭에 싸서 나르던 흙이 틈으로 떨어지며 산이 되었고, 바다에선 섬이 되었죠. 그리고 강과 큰 바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고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해요. 오래전부터 한국에 전해져 온 설화 마고할미 이야기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벽화 중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에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세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창세기 9장면이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벽화 중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에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세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창세기 9장면이 그려져 있다.

한 거인 여신이 자연이나 세상의 지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를 보통 ‘창조신화’, 또는 ‘창세신화’라고 부릅니다. 신화에서는 본래 인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존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창세신화는 그중에서도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신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창세신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고할미 설화처럼 어떤 신적인 존재가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내용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도 그중 하나죠.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라고 하죠. 이로써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고 낮과 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또 물을 둘로 나누어 하늘과 땅의 물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어내는 등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어냈다고 하죠. 말씀으로서 세상이 태어나니, 이 ‘말’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잘 느낄 수 있는 이야기죠.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세상을 창조한 신 브라흐마가 등장합니다. 태초에는 혼돈에 가까운 우주가 존재했는데, 그 사이에서 출현한 브라흐마가 신비한 에너지로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 공간(空)의 다섯 원소의 근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도 신화에는 그 밖에도 매우 다양한 창세 이야기가 있는데, 브라흐마가 알에서 태어나 알껍데기로 세상을 만든 내용도 있죠. 재미있게도 브라흐마가 아니라 비슈누나 시파, 또는 여신 파라샥티가 먼저 태어나 세상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인도에는 워낙 신이 많고 그들을 따르는 종파도 다양하다 보니, 역시 자기가 믿는 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많은 신화에서 세상은 처음 생겨난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신화가 그런 것은 아니죠. 대표적으로 북유럽의 게르만족 신화에서는 최초에 태어난 거인, 이미르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일찍이 세상에 이미르가 태어났는데, 이후에 등장한 신들이 그를 죽이고 그 시체로 세상을 만든 거죠. 이미르의 몸은 땅이 되고, 머리뼈는 하늘이 되며, 머리털과 뇌수·뼈·피, 그리고 이빨 등이 각각 숲과 구름·산·바다와 호수, 그리고 바위와 돌이 되었습니다.

중국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에서 소개된 신화인데, 혼돈의 알에서 반고라는 거인이 태어나 자라났다고 해요. 반고가 커질수록 세상은 위로 늘어나면서 하늘과 땅이 서로 나뉘게 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애쓰며 천지를 나눈 반고는 지쳐서 죽고 말죠. 그렇게 죽어버린 반고의 몸이 태양이나 달, 산이나 강, 길이나 나무 같은 것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세상을 만들었는지는 모릅니다. 마고할미처럼 우연히 세상을 만들 수도 있지만 브라흐마처럼 깨달음을 얻은 결과 세상이 생겨날 수도 있고, 외롭거나 자신이 살 땅이 없어서 만든 신도 있죠. 물론, 창조자들이 좋은 의도만으로 세상을 만든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판타지 이야기(이따금 SF에서도) 속에선 창조자가 사실 사악한 존재라고 설정하기도 하죠. 가령, 인간의 싸움을 영화처럼 즐기기 위해서라거나, 인간의 영혼을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서라거나. 게임처럼 직접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란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창세신화에선 누군가의 노력으로 이 세상이 태어나 인간의 땅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인간이고, 창조자가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들어주었다는 거죠. 심지어 이미르나 반고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과학적인 내용과 관계없이 창세신화는 매우 고마운 이야기죠.

2022년 한 해가 새로 시작됐습니다. 이는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죠. 코로나19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로 힘겨운 세상. 하지만, 그 세상이 새롭게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것은, 많은 이가 우리들의 세계를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겠죠. 누군가가 만들었건 아니면 자연스레 생겨났건, 우리의 세상 다음 새해가 더욱 좋은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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