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희생으로 죄사함 받았다? 이건 또 무슨 '마케팅'이냔 당신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2.02.05 05:00

업데이트 2022.02.05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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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는 유대의 제사 코드가 녹아 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해 줄 거라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을 끌어모아 창과 칼을 들고 로마의 군대에 맞서 ‘식민지 해방’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죽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해 줄 메시아를 기대했다. 예수가 그런 인물이 되어줄 것을 고대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해 줄 메시아를 기대했다. 예수가 그런 인물이 되어줄 것을 고대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37)당신은 정말 예수의 제자인가

모세 당시 하늘에 올렸던 제사 중에 ‘화목제(和睦祭)’가 있었다. 하느님(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한 제사였다. 소나 양 등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 간 등은 제단에서 불살랐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죽음도 일종의 화목제로 여겼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가축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몸소 제물이 된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제물이 됐기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는다고 봤다.

이 대목에서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많다. “그렇게 믿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2000년 전 예수의 죽음과 나의 죄,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어째서 나의 죄가 사해지는가. 더구나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니, 그건 또 무슨 마케팅인가. 그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그냥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건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소연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반면 ‘죄 사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하고, 예수님도 믿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런 사람들은 그다지 큰 고민이 없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거머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궁금하다. 둘 중 누구의 눈이 ‘예수의 눈’에 더 가까울까. 나는 전자의 이야기에서도, 후자의 이야기에서도 ‘예수의 눈’을 찾지 못했다. 왜일까.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숫가 오솔길을 걷다가 풀밭에 앉았다. 겨자 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무엇이었을까. 인도의 화장터에서 커다란 ‘망치’가 내 뒤통수를 때렸던 이유는 뭘까. 그저 놀라운 풍경을 본 것에 그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건 불타는 시신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내가 장작 위에 올라가 누웠기 때문이 아닐까.

모세 당시의 화목제도 마찬가지였다. 제단 위에서 타는 제물 따로, 그걸 바라보는 나 자신도 따로라면 곤란하다. 그럴 때는 아무리 제물을 태워도 내 마음은 타지 않는다. ‘제물 따로, 나 따로’에서 마음은 씻어내리지 않는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의 가슴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장작 위에서 불타는 양을 보며 내 안에 있는 에고의 마음도 타야 한다. 그래야 화목제의 의미가 살아난다.

고대 유대인들은 화목제를 지내며 제물을 하늘에 바쳤다. 그걸 통해 사람과 하느님 사이가 화목해지기를 소망했다. [중앙포토]

고대 유대인들은 화목제를 지내며 제물을 하늘에 바쳤다. 그걸 통해 사람과 하느님 사이가 화목해지기를 소망했다. [중앙포토]

불교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중국의 마조(馬祖)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회양(懷讓) 선사가 물었다. “좌선을 해서 무얼 하려고 하는가?” 마조가 답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회양 선사는 저만치 가서 벽돌을 하나 들고 왔다. 그러고는 쓱싹, 쓱싹 갈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조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럼 좌선을 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회양 선사가 답했다.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이 일화는 불교의 가슴만 찌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슴도 찌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한 길에서 나는 무엇을 때리고 있나. 수레인가 아니면 소인가.’ 마조는 훗날 대선사(大禪師)가 되어서 유명한 선구(禪句)를 남겼다. “평상심이 도(道)이다(平常心是道).”그는 왜 평상심을 도라고 했을까.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지지고 볶는데 말이다.

요한복음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말한다.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 신의 숨결이 이미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중앙포토]

요한복음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말한다.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 신의 숨결이 이미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중앙포토]

요한복음은 이 물음에 답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 3절) 행복한 마음도, 지지고 볶는 마음도 진정 누구를 통해 생겨나는 걸까. 나를 통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을 통해서일까. 성서에는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 속에 그분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답을 할 때 평상심이 도가 된다. 사도 바울은 그걸 깨닫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영화 ‘부활’에서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커다란 대못이 나의 손을 뚫고, 나의 발을 뚫고 들어와 나무에 박힌다. 그다음에 땅에 눕혀져 있던 십자가가 세워진다. 그럼 자신의 몸무게로 인해 몸이 아래로 축 처진다. 그때 손과 발을 뚫은 대못이 주위의 뼈를 짓누른다. 몸무게로 인해 손과 발의 뼈가 바스러지기도 한다. 고통은 극한에 달한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그래도 죽을 수가 없다. 십자가형에는 이런 고통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고통에 겨워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면 사형 집행인이 솜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코에다 대고 깨운다. 죄수가 다시 고통을 느끼도록 말이다. 그렇게 매달린 채 죽지 않고 며칠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래도 죽지 않으면 몽둥이로 다리뼈를 부러뜨린다. 죽음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그게 십자가형이다.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이 아닌 이방인을 대상으로 십자가 형에 처했다. 수치와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의 몫은 아니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이 아닌 이방인을 대상으로 십자가 형에 처했다. 수치와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의 몫은 아니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그에 비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빠르게 진행됐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십자가에 매달려서 1주일씩 있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다. 이튿날이 유대교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성스러운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에 사형수가 매달려 있는 걸 제사장들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십자가에 매단 당일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죽음을 확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 구원의 여정은 정말 그렇게 간단한 걸까. 그렇다면 역사 속의 성인과 수도자들은 왜 그토록 몸부림치며 자기 안의 에고와 싸웠을까. 그저 믿기만 하면 됐을 텐데 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는 과연 뭘까.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피스티스(Pistis)’다. ‘신뢰하다’라는 뜻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에게 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예수의 모자이크 상. 얼굴이 중동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예수의 모자이크 상. 얼굴이 중동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걸 예수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 비로소 속성이 통한다. 예수의 속성과 나의 속성이 통한다. 나와 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통할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비로소 화목해진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남편이 아내를 알듯이,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우리도 예수를 알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렇게 예수 안에 거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예수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답을 던졌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복음 10장 38절)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장 27절)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서 2장 19절)

예수가 내놓은 답은 ‘자기 십자가’가 아니었을까.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합당’하다.”라고 했다. 예수는 왜 ‘합당하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 말은 그리스어로 ‘악시오스(axios)’다. ‘값어치가 있다(worthy)’라는 의미도 있지만 ‘만나다(meet)’라는 뜻도 있다.

그럼 무엇과 무엇이 만나는 걸까. 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만난다. 그렇게 만날 때 ‘거함’이 이루어진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라고 할 때의 ‘거함’이다. 그런 거함의 열쇠가 ‘자기 십자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골고다 언덕에 세운 성묘교회. 그 안에서 아르메니안 교회의 성직자들이 종교 모임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골고다 언덕에 세운 성묘교회. 그 안에서 아르메니안 교회의 성직자들이 종교 모임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그러니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만 보면 어찌 될까. 고속도로 위에서 가드레일만 붙잡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종착지로 가려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발을 떼야 한다. 바퀴를 굴려야 한다.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으면 곤란하다. 그렇게 바퀴를 굴리는 엔진이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나의 제자야!”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정말 예수의 제자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인가.

〈38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수도(修道) 전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숱한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가서
몸을 숨긴 채 수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을 ‘은수자(隱修者)’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광야로 간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의 유혹에 맞서 수도(修道)를 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숨은 수도자들도
광야로 가서 ‘내 안의 악마’와 마주하고자 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로 봤던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수도 전통은
수도원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나홀로 수도’에서 ‘다 함께 수도’로 바뀐 겁니다.
중세 때 가톨릭 교회가 세속의 정치에 물들고,
성직자들도 타락하고, 물질적으로도 오염됐을 때
그걸 정화하자는 운동은 늘 수도원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길을 잃지 않고
지금껏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파들은
“예수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가톨릭에서 독립해 개신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수도 전통은
가톨릭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건 그리스도교 전체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다시 말해 수도 전통은 개신교에게도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란 말입니다.
아쉬운 건 종교개혁 과정에서 개신교가 가톨릭을 부정하면서
수도 전통까지 다 함께 부정했다는 점입니다.

이제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SNS와 유투브, 각종 인터넷 네트워크로 인해
우리는 좋은 길잡이와 정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수도원의 영성’을 넘어서 ‘일상의 영성’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수도자의 영성’을 넘어서 ‘평신도 누구나의 영성’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종교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다들 걱정합니다.
종교도 이제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합니다.
크게 바뀌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종교가
적지 않게 나올 거라고 우려합니다.
산업혁명 시대에 석유를 넣는 자동차가 등장하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마차들처럼 말입니다.

핵심은 본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게 종교의 경쟁력이니까요.
인간을 자유롭고, 지혜롭고, 행복하게 해 줄 종교적 본질을
소수의 집단이 아니라 다수가 일상에서 누리게 하는 일.
이게 ‘종교의 산업혁명 시대’를 뚫고 나가게 할
종교의 경쟁력이 아닐까요.

저는 그리스도교의 수도(修道) 전통에서
그 열쇠 중에 하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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