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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끔찍한 민낯 고발, 공생 실마리를 찾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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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4호 18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러’ 송상희 작가

전시장에서 복합매체 설치작품 ‘신세계’와 ‘말걸기’ 사이에 선 송상희 작가. 전민규 기자

전시장에서 복합매체 설치작품 ‘신세계’와 ‘말걸기’ 사이에 선 송상희 작가. 전민규 기자

30여 년 전 방사능이 휩쓸고 간 체르노빌의 유령도시, 세계 2차대전에 희생된 망자의 영혼이 서린 일본 오소레산, 스크린도어 사고를 당한 김군이 차마 떠나지 못했을 구의역…. 어떤 대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만 남은 빈 공간을 따라간다.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초현실적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미술관 곳곳에 영상 속 오브제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저들의 희생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며,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고 외치는 듯.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자연스러운 인간’은 하나의 커다란 우주다. 2008년 에르메스 미술상,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송상희 작가의 첫 국내 국공립미술관 개인전인데, 그에게 흔히 따라붙는 ‘미디어 아티스트’란 타이틀이 한참 부족하게 느껴지는 전시다. 델프트블루 타일부터 7채널 비디오 설치까지, 영상과 음악은 물론 드로잉, 텍스트 등 온갖 매체를 총망라해 자기 철학을 펼쳐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러’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송 작가는 재앙이 휩쓸고 간 역사적 장소를 찾아다니며 ‘몫이 없는 자들의 소리없는 죽음을 진혼하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이번 전시는 보다 인간의 내면을 향한다. 니체가 말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이라는 끔찍한 본바탕’을 직시하며 공생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다. 2006년부터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탓에 데뷔 20년 만에 첫 국내 대규모 개인전을 열게 된 만큼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펼쳐냈단다.

‘코로나 숙주설’ 천산갑이 무슨 죄?

‘신세계’의 일부인 델프트블루 타일 위에는 서구 문명의 식민의 역사를 아우르는 모티프가 드로잉되어 있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신세계’의 일부인 델프트블루 타일 위에는 서구 문명의 식민의 역사를 아우르는 모티프가 드로잉되어 있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저를 검색하면 딱 나오는 말이 ‘타인의 슬픈 사연을 대변하는 작가’인데, 늘 부끄러웠어요. 저 그렇게 남을 이해하고 사는 사람이 못 되거든요.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사사로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십 년 전 타국에서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자격이 있나 싶었는데, ‘올해의 작가상’을 받고 나니 제가 자취를 쫓던 ‘그들’이 떠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안의 수많은 나’만 남겨진 느낌이 들어 ‘나들’과 대화를 하게 됐죠. 어떤 일에서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도 그런 맥락 속에 엉켜있는 거잖아요. 서로 자기와 대화하다 보면 세상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담아 봤어요.”

오랫동안 재앙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팬데믹 같은 인간의 파국을 예감한 느낌이다. 인간이 어쩌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묻는 듯 하달까. “10여 년 전 어떤 공공 프로젝트를 할 때 문득 우리가 마지막 터널 끝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터널 밖으로 나가는 경계에 걸려있는 느낌이랄까. 바깥 세상을 공부하는 차원에서 종말론이나 SF소설을 찾아 읽게 됐는데, 옛날 소설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더군요. 체르노빌에 가보니 오히려 우리 미래모습으로 보일 정도였죠. 팬데믹을 예감한 건 아니지만, 영향받은 건 있죠. ‘말걸기’란 작품에 코로나 숙주로 지목됐던 천산갑의 비늘과 눈동자가 보일 거에요. 인도네시아에서 약재로 쓰는 동물이라는데, 얘가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요. 인간이 보신용으로 데려가서 가둬놓고 서식 환경을 바꿔버렸으니, 다 인간이 벌인 일이죠.”

송 작가의 작품은 일관되게 거대한 수집 자료의 아카이빙에 기반한다. 각자 다른 역사에서 가려진 부분이나 잊혀진 것들에 말을 걸어 다시 관계 맺는 작업이다. 서로 느슨한 관계가 있는 사료, 그림, 영상, 문학 등이 몽타주처럼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가령 첫 작품 ‘사과’에서 갈릴레이와 제자 안드레아의 지동설에 관한 대화를 맨해튼 프로젝트 기록영상과 함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입으로 전달해 과학과 윤리를 부딪치게 하고, 성소수자로 핍박받았던 앨런 튜링의 전기 ‘이미테이션 게임’의 텍스트와 그가 좋아했다는 백설공주 애니메이션을 병치해 현대에 재평가받고 있는 튜링을 백설공주의 부활에 빗대는 식이다. 요컨대 사과라는 모티브를 둘러싼 다양한 상징을 미묘하게 엇갈린 구조로 보여주면서 지금 당연시되는 진리와 가치가 과연 영원한 것인지 묻는다.

마지막 작품 ‘말걸기’에서도 머리 위를 빙빙도는 6대의 드론 스피커와 스크린에 몽타주된 풍경들이 대화를 이어가는데, 1차원적으로 합치하게 하는 게 아니라 파편들을 해체해놓고 관람객에게 퍼즐맞추기를 요구하는 느낌이다. “사실을 논리적으로 펼쳐서 어떤 맥락의 주장을 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그런 수많은 주장들을 새로 맞붙여서 확장시키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싸움이 많은데 이유가 뭐라는 건 학술 쪽에서 할 일이고, 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광주, 노르웨이 우퇴위아섬 상황을 같이 하나의 땅으로 보여주는 역할 분담이랄까요. 어떤 상황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때 관점도 의문스럽잖아요. 역사란 누가 썼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혀지니까요. 그걸 가능한 해체시켜서, 그렇게만 보지 말고 잠깐 옆도 같이 보면 다르게 보일수도 있다고 제안하는 게 예술가의 몫이겠죠.”

암스테르담에 15년 넘게 머물고 있어서인지 송 작가의 작품세계는 무국적이다. 해외에서 잘나가는 한국 작가들이 통상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K아트’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작품세계가 완전히 우주적 관점으로 바뀌었다.

“외국에 살면서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늘 받는 느낌인데, 그러다보니 ‘한국 여자’의 관점을 넘어서게 된 것 같아요. 한국에서 단순히 여자라는 관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작업을 하던 시절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죠. 유럽에서 나를 규정하려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니까요. 나, 아시아 여자, 아시아 한국 여자, 아시아 한국 여자와 네덜란드, 아시아 한국 여자와 유럽의 관계라는 식으로 점점 커지게 된 것 같아요.”

관점 해체하고 확장하는 게 예술가

복합매체 설치 작품 ‘꿈’.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복합매체 설치 작품 ‘꿈’.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세계 미술계가 다양성에 주목하면서 아시아와 로컬의 토속적인 소재를 발굴하는 흐름에서 그가 네덜란드 특산품인 델프트블루 타일을 재료로 사용하는 것도 재미있다. 고급스런 장식품을 서사의 도구로 반전시킨 것도 의미심장하다. 무역과 도둑질의 신 헤르메스부터 신대륙발견과 대항해시대 영향인 『로빈슨 크루소』, 천연두까지 빼곡하게 타일에 그려 넣은 작품 ‘신세계’ 얘기다.

“델프트블루가 중국 청화백자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잖아요. 세상이 물건과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촘촘히 얽혀간 증거물이랄까. 네덜란드가 아시아로 들어온 잔재인 건데, 동인도회사가 군사를 쓸 수 있는 엄청난 회사였더군요. 필요하면 물리적으로 뺏어올 권리를 나라가 준 거죠. 척박한 나라 네덜란드가 후추를 찾아 인도네시아에 가서, 수많은 향신료를 보고 다른 나라들이 오기 전에 다 차지하려는 욕심이 생겼고, 그런 식으로 유럽의 각국이 하나씩 식민지를 개척한 거잖아요. 시작은 미지의 것에 대한 소소한 호기심이었겠죠.”

이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지동설과 핵개발을 엮은 ‘사과’부터 인도네시아 천산갑의 눈동자가 숨겨진 ‘말걸기’까지 총 7작품이 거대한 세계관의 일부인 것이다. “콜럼부스가 남미에 가서 원주민을 몰살시킨 게 총칼이 아니라 천연두였잖아요. 역병이란 게 외래문명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체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시작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겠죠. 그게 핵이 되고 우리를 죽이는 무기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그걸 넘어서 살아야 되잖아요. 안다는 것은 감당해야 할 책임감을 업고 가는 일이죠. 그 말을 하고 있는 게 병풍식 드로잉 ‘업고’예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의 것에 손대고, 그러다보니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도 되는 ‘인간의 끔찍한 본바탕’이 스스로를 극한의 위기로 몰아넣고 만 아이러니. 하지만 송상희는 이런 인간세상의 민낯 속에서 공생의 가능성을 찾는다. ‘말걸기’에서 무차별적 테러가 발생한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보여주며 ‘너는 대체 누구냐’고 묻는 것도 그래서다. “내 속의 나와 싸우다보니 보편적 규범이나 윤리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나 싶더군요. 가장 책임지는 자세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한 나와 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너나 나나 껍질을 벗기면 다 오류로 가득하고 지리멸렬한 채 서로 엉켜있잖아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 내가 너한테 가해자가 될 수 있지만 나는 피해자이기도 해. 너도 그렇잖아.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물망 속에 걸려 같이 살아야 되는 운명이라면, 너무 미워하지 말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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