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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부인의 실수로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 된 사나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78)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에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 같은 앞다리, 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는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츠리고 가만히 업졌것다.

이제는 앞의 한 문장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혹은 입으로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딸려 나온다.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수궁가’의 한 대목인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자라가 토끼 간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고 육지로 떡하니 올라섰는데, 막상 토끼가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난감하니 그저 “토생원 계시오~”하고 겨우 목소리를 내어 본 게 “호생원 계시오~”가 되었고, 어디서 나를 부르는가 하고 호랑이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호생원의 생김새는 큰 덩치에 쇠낫 같은 발톱을 가진 데다 주홍 입을 떡 벌리고 우뚝 선 모습이다. 흔히 산골짜기에서 마주치는 호랑이는 그렇게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위협적인 자태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호랑이는 실제로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그 덕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 말 그대로 씨가 말라버렸던 것인데, 사람이 호랑이로 변해버린 이야기가 있으니 그 성정(性情)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옛 이야기에서는 ‘여산대호’라 불리는 큰 몸집과 떡 벌린 아가리로 포효하는 호랑이가 위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놀려 먹으며 퇴치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사진 pixabay]

옛 이야기에서는 ‘여산대호’라 불리는 큰 몸집과 떡 벌린 아가리로 포효하는 호랑이가 위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놀려 먹으며 퇴치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사진 pixabay]

전라남도 해남 어디에 한 선비가 살았다.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여 고명한 의원을 찾아갔더니 의원은 황개 300마리를 먹어야 낫는 병이라고 하였다. 쪼들리는 형편에 개 300마리를 구할 도리가 없었던 선비는 뒷산에 움막을 지어놓고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는 법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한 책에서 호랑이 변신술을 배워, 밤마다 호랑이로 변신하여 돌아다니며 개를 잡아 오기 시작하였다. 선비의 부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끔찍이 여겨 남편이 호랑이로 변신해 나간 사이에 그 책을 불태워버렸다. 그 책을 보고 주문을 외워야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책이 불타 버린 것을 알게 된 남편은 부인도 잡아먹고는 그길로 집을 나가 팔도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잡아먹었다.

영화 ‘로렌조 오일’처럼 불치병에 맞서 치료법을 연구해 알아내는 이야기도 있건만, 이 선비는 어머니를 살리겠다고 책 붙들고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 얻어낸 게 주문을 외우고 재주를 넘으면 호랑이가 될 수 있는 술수였다. 그렇게 호랑이가 되어서는 부지런히 개를 잡아 와 어머니께 달여드렸으니 효자는 효자이되, 한번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이는 번듯한 인간으로서의 인성(人性)을 호랑이의 수성(獸性)에 잠식당하였다.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마저 잃은 그는 이젠 개뿐만 아니라 사람을 마구 잡아먹으며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팔도를 돌아다니는 황씨 선비라 하여 이름이 황팔도다.

황팔도 때문에 온 나라에 곡소리가 끊기지 않을 지경이 되자 나라에서는 전국의 포수들을 불러들여 황팔도를 잡아 오라 명을 내렸다. 충청도 보령에 최 포수라는 유명한 포수가 몰이꾼들과 함께 황팔도를 잡겠다고 나섰다. 황팔도가 지나갈 것으로 짐작되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데 몰이꾼들이 황팔도 지나간다고 소리치며 뛰어왔다. 그런데 최초수가 보기엔 그냥 조금 큰 강아지 같은 게 보여서 ‘저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냥 있는데, 사람들이 총 안 쏘고 뭐 하느냐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방아쇠를 당겼더니, 그놈이 펄쩍 뛰었다 떨어지는데 하도 크고 무서워서 최포수는 뒤로 벌떡 자빠져버렸다. (『한국구비문학대계』 4-5, 601-606면, 구룡면 설화18, 황팔도 전설, 임태순(남, 64))

그렇게 잡고 보니 황팔도의 귀에 갈래갈래 털이 나 있었는데, 그 가닥을 세어 보니 전부 200가닥이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황팔도가 사람을 200명은 잡아먹었다고 생각했다. 그 지역 사또는 최포수가 산군을 잡았다며, 그 벌로 삼대 3개로 최포수의 종아리를 세 번 때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 끝에 구연자와 청중들끼리도 “무슨 주문을 읽어서 사람이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하느냐”, “아니, 근데 뭐 도통한 사람들 이야기도 있잖느냐”, “정성이 워낙 있으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어른들이 보셨다는 얘기를 조그만 할 때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이게 진짜 있는 일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전설이지, 이러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한참 나눈다.

이야기가 그렇게 황당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 거짓부렁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사람이 호랑이가 된다는 것은 존재적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부모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극적인 의지는 한겨울에도 딸기를 찾아 나서는 효자나, 약수를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 머나먼 길을 찾아가야 했던 바리데기,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에게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자신 고유한 모습을 간직한 상태에서 움직였다면, 황팔도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이루기 힘든 일에 맞닥뜨려서 자기 모습을 버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자기 모습을 버린다는 것도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황팔도의 경우엔 스스로 짐승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니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결말로 가기도 쉽지는 않았겠다. 더 문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수성이 폭발한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에서는 호랑이가 되어 떠돌던 황팔도가 한 번이라도 어머니가 계시던 집을 보고 죽겠다고 다짐하고는 산에서 내려오다 포수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내 생명은 이것으로 끝이다. 더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 하고 외치고는 포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높은 벼슬아치가 된 어릴 적 친구를 만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친구에게서 담배를 얻어 피운 것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내력이 되었다고 하는 변이형도 있다. 본인 스스로 극도로 좌절한 상태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황팔도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효행도 좋지만 무리한 방법을 쓰거나 좋지 못한 마음으로 행했을 때는 끝이 좋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대표적인 민화 호작도(虎鵲圖). 권력자를 상징하는 호랑이는 바보스럽게, 민초를 대표하는 까치는 당당하게 묘사되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표적인 민화 호작도(虎鵲圖). 권력자를 상징하는 호랑이는 바보스럽게, 민초를 대표하는 까치는 당당하게 묘사되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엄마로 둔갑한 호랑이가 아이들을 해치려 덤빈다는 점에서 이 호랑이는 엄마의 다른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것처럼, ‘황팔도 전설’에서는 부모를 위한 갸륵한 마음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 길이었지만 호랑이가 되어 개를 잡아 오고, 급기야 부인을 해치고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투철한 의지나 신념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해가 바뀌고 명절을 맞이하는 와중에 우리 사회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그 와중에 인간으로서의 합리적 이성이나 판단보다는 각자 개인의 신념이나 의지에 따라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계속 먹을 것을 요구하며 이성을 잠식하는 수성의 호랑이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별주부 자라의 부름에 ‘흥앵흥앵’ 우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던 호랑이는 자라에게 그것을 물려 함경도까지 도망갔다. 아이들만 있는 집에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이들이 집에 있던 강아지를 한 마리씩 던져 주다가 그래도 가지 않자, 방 안 화로에 돌멩이를 달구어 그걸 집어던졌더니 덥석 물었다가 호랑이가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산대호(如山大虎)’라 불리는 큰 몸집과 떡 벌린 아가리로 포효하던 모습은 외부 세상의 위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우리 이야기들에서는 그런 존재를 아이들도 놀려 먹으며 퇴치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권위, 권력, 신념, 의지 등에 함부로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그 대상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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