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의 이집트 순방에 동행했던 김정숙 여사의 피라미드 방문 일정을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3일 파악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집트측이 관광 활성화를 위해 대통령 부부의 피라미드 방문을 요청해와 고민 끝에 이집트 문화부 장관이 동행한 김 여사의 단독 방문이 이뤄졌다”며 “일정은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논의돼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비공개였지만, 공식 일정이었기 때문에 피라미드 방문 사실 등은 청와대의 공식 기록으로 남겼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5~22일 진행된 문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순방은 출국 전부터 야권으로부터 “코로나 정국에서 강행된 외유성 순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청와대는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로 순방 중 수행단 다수가 코로나에 확진된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이를 은폐했고, 이에 더해 김 여사가 피라미드를 홀로 둘러본 사실까지 공개하지 않다가 들통난 모양새가 됐다.
청와대는 김 여사의 동선을 알리지 않기 위해 이집트에 직접 방문을 비밀로 하자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이날 페이스북에 “이집트 유적지 방문에 대해 어떤 음해와 곡해가 있을지 뻔히 예상돼 (부부 동반 방문 요청을) 거절했다. (김 여사의 방문을)비공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집트가) 의아해했고, 나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었다”는 글을 올렸다.
탁 비서관은 그러면서도 김 여사의 동선 은폐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 “정말 애쓴다”며 비꼬았다.
순방의 실무를 담당했던 외교부 당국자들은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일제히 “일정을 미처 알지 못했다”거나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답변을 내놨다. 외교가에선 “일정 조율은 물론 공개 여부까지 현지에서 급박하게 이뤄졌거나, 청와대로부터 함구령이 내려졌다는 뜻”이란 말이 나왔다.
특히 이집트가 대통령 부부를 피라미드에 초청한 이유가 관광 활성화인데,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 일정 자체는 비공개하더라도 사후에까지 비밀에 부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초청국 영부인의 방문을 비밀로 하는 것은 관광 산업 홍보라는 목적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교부 1차관과 의전장을 지낸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통상 한 국가의 장관이 외국 정상 일정을 수행했는데도 이를 비공개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김 여사의 피라미드 방문을 비공개로 하자고 요청한 것은 이집트의 초청 취지마저 무색하게 한 외교 결례”라고 말했다.
야당의 공세도 거세졌다.
김근식 전 국민의힘 선대위 정세분석실장은 페이스북에 “김 여사의 버킷리스트를 채우기 위한 졸업여행이었다”며 “수행단에서 확진자까지 발생해 대통령이 자가격리하는 마당에 굳이 피라미드를 구경하고야 마는 김 여사님”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공무원을 몸종처럼 부린 김혜경씨나, 대통령 정상회담을 자신의 버킷리스트 채우는 사적용도로 악용하는 김 여사나 도긴개긴”이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자처해 “피라미드 방문에 대한 이집트의 정중한 요청을 거절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외교적 결례”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비공개 결정에 대해선 “양국의 협의에 의한 것”이라는 말 외에 한국측의 요청 여부 등은 추가로 설명하지 않았다.
청와대 내에선 “알려질 수밖에 없는 사실을 무리하게 감추려다 과거 유사 논란까지 모두 비판당할 근거를 만들어준 셈이 됐다”는 말이 나온다.
청와대는 그간 ‘외유성 순방’ 논란이 일때마다 강경 대응으로 일관해왔다.
특히 2019년 6월 본지가 ‘김정숙 여사의 버킷리스트’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앙코르와트, 타지마할, 프라하, 베트남 호이안, 바티칸 성베드로성당 등 김 여사가 방문한 장소를 소개하자, 청와대는 극히 이례적으로 칼럼에 대한 공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듬해 소송에서 패소하자 관련 사안에 대해 침묵해왔다.
이번 중동 순방과 관련해서도 탁 비서관은 지난달 24일 '관광 목적의 순방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자 “전혀 그럴(관광할) 시간이 없었다”며 “여행 같은 순방을 다녔던 야당과 내막을 모르는 일부 모자란 기자들이 순방만 다녀오면 관광이네, 버킷리스트네 하는 말들을 쏟아내서 아주 지겹게 듣고 있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2018년 11월 체코ㆍ아르헨티나ㆍ뉴질랜드 순방 등 과거 순방까지 새삼 구설에 오르고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아르헨티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전 동유럽인 체코를 방문했다. 남미 순방 때면 급유 등을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동포 간담회 등을 했던 전례와는 완전히 다른 동선에 대해 야권에선 “외유를 위한 무리한 일정”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청와대는 “체코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방문”이라고 주장했다.
정작 문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체코 대통령은 이스라엘 순방으로 나라를 비운 상태였다.
이 때문에 문 대통령의 당시 일정은 체코 총리와의 환담이 사실상 전부였다. 특히 프라하 비투스 성당을 관람한 김 여사는 문 대통령이 이미 성당을 빠져나간 것도 모른채 홀로 관람을 계속하다, 뒤늦게 “우리 남편 어디 있나요”라며 밖에서 기다리던 문 대통령에게 황급히 뛰어가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