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역사, 사실의 역사
형벌의 역사성을 다룬 올해 첫 칼럼(1월 7일자)에 한 독자가 “조선이 문명국가라는 무리한 테제를 주장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 글에 답하여 내 칼럼에 대한 반성과 함께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난 칼럼에서 유럽 중세와 비슷하게, 조선시대 형정이 잔인할지언정 야만적이지는 않았다고 서술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지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는 종종 ‘문명=선(善), 야만=악(惡)’ 같은 가치 관념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명 겸 설명을 덧붙이자면, 나는 이 칼럼에서 문명이라는 용어를 자연상태(=야만)와 달리 인위적인 삶의 양식을 따르는 사회 및 문화 일반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썼다. ‘조선 문명’이라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황하 문명, 잉카 문명 같은 의미로 범범하게 쓰는 것이라고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문명을 왕조나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삶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보고 있다.
“소론과 가까웠기 때문” 근거 없어
“권력은 자식과도 못 나눠”는 추측
세자의 비행·광증이 가장 큰 원인
왕조체제라는 큰 틀에서 이해해야
수많은 비극과 전쟁 어떻게 볼까
역사는 구조와 의지, 우연의 엉킴
유대인 학살, 인디언 학살의 비극
다시 말하건대 나는 문명=선, 야만=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을 개화(開化)로, 야만을 미개(未開)로 구분하는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사회나 인종을 도덕적·종교적으로 서열화했다. 19~20세기 제국주의 침략 때 무지막지한 도륙과 살상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학살, 일본군의 난징 학살,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미국 앵글로 색슨의 인디언 학살 등등.
문명이 만든 법률과 기술, 과학은 자연상태의 야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어떤 짓보다 훨씬 잔인할 수 있다. 그래서 형벌이 ‘잔인하지만 야만적이지는 않을’ 수 있던 것이다. 문명이 만든 법률, 기술이 훨씬 더 사람을 잔인하게 다룰 수 있다. 더구나 법적으로 이러이러하게 규정돼 있다는 제도의 차원과, 그 법적 규정을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은 구별돼야 한다. 후자의 경우라면 문명사회가 훨씬 더 잔인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잔인할 수 있는 수단이 많으니까!
앞서 말한 댓글을 단 독자는 “신체의 자유, 피의자 인권, 공개재판 원칙도 없는 전 근대의 처벌 과정이 아름다웠을 리 없다”고 말했다. 나는 조선의 처벌 과정이 아름다웠다고 한 적이 없다. 이런 오독의 배후에 혹시 근대주의적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신체의 자유, 피의자 인권, 공개재판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지켜질 때도 있었다. 하나 바람직하다고 다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현실은 인간에게 과제 상황으로 남을 뿐이다.
이 독자의 댓글 중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흔히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가 당시 ‘1000여 명이 도륙된 잔혹한 인권유린의 참사’라는 부분이다. 어떤 근거에서 1000여 명이 도륙됐다고 주장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기축옥사에 대한 소문은 임진왜란으로 당시 기록이 멸실됐고, 그 위에 당쟁론이 겹치면서 기억이 왜곡되며 빚어졌다. 예컨대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조사 책임자인 위관(委官)으로 있으면서 상대 당파를 몰살했다는 식의 소문이다. 위관은 정철만이 아니라 류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元)도 맡았고, 과도한 형벌이라고 구설에 올랐던 이발(李潑) 노모와 어린 아들 사망 사건 당시 위관도 류성룡이거나 이양원이었다.
기축옥사에서 1000명이 죽었다고?
또한 누가 위관이었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반역사건을 조사·신문하는 추국청은 한두 사람이 좌우하지 못한다. 위관 외에도 추관·낭청이 있었다. 이산해·심수경 등 정승을 포함하여 다수의 추관과 낭청이 사건 조사를 맡았으며, 다른 추국과 마찬가지로 정점에는 국왕인 선조가 있었다. 거기에 인간이 인간을 처벌하는 형벌제도의 불완전성이 더해지면서 죄 없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동하지만,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구조(조건)의 규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우연이 결합한다. 이 때문에 설명하기도 어렵고,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비극이 생기기도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곧잘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자.
이 사건을 두고 사도세자가 소론과 가까워서 죽임을 당했다고 당쟁론에 따라 해석하기도 하고, 영조가 늙어서 그랬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소론과 가깝다는 건 상상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고, 영조가 늙어 망령이 났다는 단서 역시 전무하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못한다는 냉소주의식 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국왕과 세자의 권력 또는 권한은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국왕과 세자는 다툴 일보다 협력할 일이 훨씬 크고 많다. 그렇기에 조선 역사에서 국왕과 세자가 불편한 적은 있었어도 갈등한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근거가 없거나 하나 마나 한 설명이 나오는 현상이야말로 사도세자의 죽음이 보통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기에 갖는 당혹감의 반영일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를 종합하면, 사도세자는 10여 세부터 시작된 정신불안과 의대증(衣帶症·옷을 입으면 발작하는 증세)이 악화해 내관과 나인을 죽였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공격했으며, 생모인 정빈 이씨도 죽이려고 했다. 뒤주에서 죽기 한 해 전인 1761년에는 기어이 사랑하던 경빈 박씨를 죽이고, 자신과 박씨 사이에 낳은 한 살짜리 아이를 칼로 쳐서 연못에 던졌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그 아이를 구했고, 영조는 그 아이의 자(字)를 연재(憐哉), 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평범한 집안이었다면 없었을 사건
통상의 의미에서 이 사건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비행과 광증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뒤주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난 이유를 논하기 위해서는 왕정(王政) 자체의 성격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죽지 않았으면 사도세자는 세자가 될 일이 없었고,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에게서 왕자가 태어났다면 더더욱 세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우연이 겹겹이 쌓여 그는 세자가 됐다. 세자가 안 됐으면 겪지 않았을 죽음, 그래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사도세자의 비극이다.
그러나 쉽게 사람을 죽이고, 정신까지 이상한 세자를 어찌해야 했을까. 저를 낳은 어미까지 나서서 영조에게 처분을 청하게 한 세자였다. 어머니 정빈 이씨의 청이 있은 지 한 달 뒤,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었다. 그 한 달 동안 영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300년 이어온 왕조, ‘열성조(列聖朝)’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대로라면 자신은 그 열성조에 불효를 저지르게 될 것인데, 사도세자를 폐위하여 귀양 보내자니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면 자신의 아버지를 귀양지에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약도 생각했겠지만 어느 누가 감히 세손의 아버지에게 사약을 들고 가려고 하겠는가. 자결도 하게끔 해보았지만 세자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누가 세자가 죽는데 뻔히 보고 있겠는가. 뒤주의 죽음은 그렇게 선택된, 아니 강요받은 영조의 비극이기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아니었거나 세습 체제가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었다. ‘웬수’라는 말을 입에 달고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부모·자식 관계였다면 겪지 않았을 비극 말이다. 현명한 독자들의 사실과 논거에 입각한 깊이 있는 해석을 기다린다.
역사 탐구, 시대와 개인 사이
역사학자는 ‘모든’ ‘언제나’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지만, 모든 사실과 사건은 언제나 독특하다. 모든 인간이 언제나 다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저마다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인간관계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그 모든 사실에 언제나 구조·의지·우연이 동시에 담겨 있다. 구조를 고려해야 사실을 설명할 수 있고 시대와 사회의 과제를 극복할 수 있지만, 구조만 고려하면 인간이 감당할 일도 사라지고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된다. 의지를 고려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고양할 수 있지만, 의지만 고려하면 ‘하면 된다’는 구호가 바로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는 점을 잊게 한다.
구조와 의지에 더하여 모든 사실에는 인식의 한계를 수반한 우연이 겹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삶은 비극과 희극으로 얼얼한데, 우연들이 우리를 더 휘청거리게 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구조·의지·우연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실을 들여다보기, 이것이 역사 탐구 아닐까.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