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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노루 모피 50장→10장… 과중한 공납 줄여준 청백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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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9)

한라산 중턱인 제주 곰솔공원에 세워진 이약동의 산신단 사적비. [사진 제공 김천문화원]

한라산 중턱인 제주 곰솔공원에 세워진 이약동의 산신단 사적비. [사진 제공 김천문화원]

① 모피 공납 50장을 10장으로

제주목사 이약동은 1470년(성종1) 부임 이후 현지 구석구석을 돌아본 뒤 섬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부과되는 공납을 줄여 달라고 조정에 간청한다. 공납을 둘러싼 아전 등의 횡포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뜻밖에 성종 임금이 화답한다. “폐단이 적지 않다. 당장 공물 수량을 줄이라.” 노루 모피는 50장을 10장으로, 진주 등은 있을 때만 올리도록 바뀌었다. 과중한 공납을 일거에 줄인 적폐 청산이었다.

② 사냥 임시 거처는 장막으로

이약동은 수령이 사냥을 나가면 백성들이 임시 거처를 짓느라 노역에 시달리는 것도 알게 됐다. 당시 제주 3읍 수령은 군사훈련을 겸해 자주 사냥을 나가면서 야영했다. 그때마다 섬사람들은 수령이 임시로 거처할 집을 지어야 했다. 이약동은 사냥이 군사훈련이어서 이를 폐지할 수는 없어 임금에게 고통을 줄일 방안을 하소연한다. 성종이 다시 답을 내린다. “임금의 거가(車駕)가 가는 곳도 장막을 설치하는 것이 전부인데 신하들이 이럴 수가 있나?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

③ 한라산 산신제 자리 정상에서 중턱으로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시대 제주목사 관아. [사진 제공 김천문화원]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시대 제주목사 관아. [사진 제공 김천문화원]

제주목사는 이번엔 한라산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는 한라산 산신제를 지내는 산천단을 정상에서 중턱으로 내린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탐라지(耽羅誌)』에 전하는 이 업적은 제주 사람들이 오래도록 칭송한 적폐 청산의 결정판이다. 산천단은 고려시대 처음 조성돼 조선 초까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봄과 가을 제사 때는 많은 관리와 군졸이 동원돼 제물을 지고 며칠씩 산을 오르고 야영해야 했다. 봄과 가을 한라산에는 눈과 비가 자주 내리고 기상이 나쁠 때가 많아 동원된 섬사람들은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심지어 동사자도 발생했다. 이약동은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한 뒤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 지금의 곰솔공원으로 옮겼다. 그 뒤 산신제로 고통을 겪는 폐단은 사라졌다.

④ 말채찍까지 반납

1472년 이약동은 제주목사로서 3년 직임을 마치고 제주도를 떠난다. 그는 재임 중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을 모두 관아에 반납했다. 그리고 육지로 떠나는 나루터로 향한다. 그가 한참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손에 든 말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것도 관물인데. 그는 다시 관아로 돌아가 말채찍을 걸어 놓았다. 후임자들은 이를 청렴으로 여겨 오랫동안 그대로 두었다.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없어지자 섬사람들은 바위에 그 채찍을 그렸고 이후 그 바위는 괘편암(掛鞭岩)으로 불렸다.

⑤ 바다에 던져진 선물 갑옷

경북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 청백사에는 조선시대 청백리로 녹선된 이약동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 송의호]

경북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 청백사에는 조선시대 청백리로 녹선된 이약동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 송의호]

이약동은 이제 육지로 떠나는 배를 탔다. 조금 뒤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배는 파선 위기를 맞는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 말한다. “나는 제주도에서 사리사욕을 취한 게 없다. 일행 중 누구라도 섬 물건을 챙긴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섬사람들이 우리를 탐관오리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한 군졸이 이실직고했다. “행차가 막 떠나려는데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바치면서 바다를 건넌 뒤 사또께 전해 달라고 해 숨겨 왔습니다.” 이약동은 “그 정성은 알았으니 그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지시했다. 갑옷이 바다에 던져지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갑옷이 던져진 곳은 투갑연(投甲淵)으로 불렸다.

경북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에 배향된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1416~1493)의 제주목사 시절 이야기다. 노촌은 제주도 선정(善政)이 알려져 이후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며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4번과 5번 이야기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등장한다. 공직자의 청렴은 시대와 무관한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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