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쁜 '상고대 천국' 펼쳐졌다…운 좋은 날, 덕유평전을 걷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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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겨울 산행 명소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 상고대가 나무와 바위를 하얗게 뒤덮은 모습이 겨울 왕국 같았다. 1월 20일 촬영했다.

덕유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겨울 산행 명소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 상고대가 나무와 바위를 하얗게 뒤덮은 모습이 겨울 왕국 같았다. 1월 20일 촬영했다.

등산의 계절은 가을이다. 2021년 국립공원 통계에 따르면, 가을철(9~11월) 탐방객이 31.7%로 사계절 중 가장 많았다. 겨울이 더 인기인 산도 있다. 덕유산이 그렇다. 겨울 풍광이 빼어난 데다 정상부까지 손쉽게 갈 수 있는 곤돌라가 있어서다. 그러나 정상석 인증샷만 찍었다고 겨울 덕유산을 다 본 건 아니다. 향적봉부터 중봉까지 이어지는 덕유평전을 걸어야 가슴 뻥 뚫리는 풍광을 만난다. 무엇보다 향적봉을 지나야 인적이 뜸해져 호젓한 겨울 산을 만끽할 수 있다. 정상부에 약 10㎝의 신설이 쌓인 1월 20일 덕유산을 다녀왔다.

15분 만에 정상으로 순간 이동

덕유산 겨울 산행은 코스를 어떻게 짜느냐가 중요하다. 곤돌라를 왕복으로 타고 향적봉만 휘리릭 다녀와도 좋지만 이건 산행이 아니다. 아무리 추워도 후끈 달아오른 몸으로 한 발 한 발 눈길을 걷고, 청량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키는 겨울 등산의 맛을 느끼려면 몸을 부려야 한다. 향적봉~중봉~동엽령 코스를 선택한 이유다.

향적봉 오르는 길, 신설을 뽀득뽀득 밟으며 걷는 맛이 일품이었다.

향적봉 오르는 길, 신설을 뽀득뽀득 밟으며 걷는 맛이 일품이었다.

20일 오전 9시 무주리조트 스키장 개시 시간에 맞춰 곤돌라를 탔다. 평일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대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 15분 만에 설천봉(1525m)에 닿았다.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아이젠을 착용했다. 설천봉에서 정상인 향적봉(1614m)까지는 600m 거리지만, 쉽사리 덤벼선 안 된다. 길이 워낙 미끄러워서다. 깜빡하고 안 챙겨온 사람을 위해 설천봉 매점에서 곤돌라 아이젠을 유상 대여해주니 빌려서라도 차는 게 좋다.

상고대는 눈이 아니다. 안개나 구름이 나무에 얹히고 또 얹혀서 언 것이다.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높을 때 볼 수 있다. 상고대는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수빙(樹氷)'이라 한다.

상고대는 눈이 아니다. 안개나 구름이 나무에 얹히고 또 얹혀서 언 것이다.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높을 때 볼 수 있다. 상고대는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수빙(樹氷)'이라 한다.

이날은 운이 좋았다. 나무에 상고대가 잔뜩 맺혀 있었다. 바닷속 산호나 사슴뿔을 연상시키는 상고대가 나뭇가지를 뒤덮은 모습이 장관이었다. 눈이 왔다고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90%를 넘고 바람이 적당히 불어야 한다. 겨울이면 아침마다 "상고대 볼 수 있나요?" 묻는 전화가 덕유산국립공원 사무소에 걸려온다. 국립공원 직원도 알 수 없단다. 날씨와 운이 따라야 한다.

백암봉에서 먹은 컵라면 '꿀맛'

향적봉 오르는 길이 눈부신 상고대가 장관이었다면, 정상부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진 풍광은 막힘이 없어 시원했다. 동쪽으로 가야산 상왕봉, 남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눈에 들어왔다. 눈 덮인 덕유산은 하얀 포말 같았고, 백두대간 마루금은 일렁이는 파도 같았다. 해발 1600m에서 바다를 본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덕유산 정상부. 아래 쪽에 눈 덮인 향적봉 대피소가 있고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덕유산 정상부. 아래 쪽에 눈 덮인 향적봉 대피소가 있고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상부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리를 떴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파는 커피를 마시고 잠시 숨을 골랐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멋진 나무가 많았다. 덕유산 국립공원 깃대종이자 크리스마스트리로 쓰이는 구상나무,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이 곳곳에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덕유산 정상부에는 '주목'이 많다. 죽어서 가지만 남은 주목도 있고 사진처럼 우람한 모습의 주목도 있다.

덕유산 정상부에는 '주목'이 많다. 죽어서 가지만 남은 주목도 있고 사진처럼 우람한 모습의 주목도 있다.

20분 만에 중봉에 닿았다. 큰 나무는 없고 사방으로 탁 트인 덕유평전의 모습이 기막혔다. 덕유산국립공원 박진 자연환경해설사는 “해발 1500m 아고산(亞高山) 지대인 이곳은 봄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엔 원추리와 비비추로 화려한 천상의 화원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하얀 눈꽃으로 덮인 겨울 풍광도 봄·여름에 뒤지지 않았다. 중봉에서 다시 20분을 걸어 백암봉에 닿았다. 쉼터에 자리를 잡고 챙겨온 컵라면과 주먹밥을 먹었다. 배가 부르고 볕이 좋으니 영하 10도인데도 살짝 졸음이 왔다.

영남과 호남을 잇던 길

봄과 여름 야생화로 뒤덮이는 덕유평전. 남쪽 방향으로 걸으면 장쾌한 시야가 일품이다.

봄과 여름 야생화로 뒤덮이는 덕유평전. 남쪽 방향으로 걸으면 장쾌한 시야가 일품이다.

중봉에서 백암봉을 지나 동엽령까지 가는 길은 탁 트인 평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참나무 무성한 숲길도 있었고, 무릎까지 폭폭 잠길 정도로 눈이 쌓여 있는 구간도 있었다. 겨울 산행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길이었다.

등산로 곳곳에 사진처럼 눈이 쌓인 곳이 많다. 아이젠, 스패츠 같은 겨울 산행 장비가 필수인 이유다.

등산로 곳곳에 사진처럼 눈이 쌓인 곳이 많다. 아이젠, 스패츠 같은 겨울 산행 장비가 필수인 이유다.

동엽령(1270m)은 유서 깊은 고갯길이다. 낙엽이 많이 쌓이고 일찌감치 겨울이 찾아올 정도로 추웠다 해서 동엽(冬葉)이다. 동쪽으로 내려가면 경남 거창군 북상면, 서쪽으로 내려가면 전북 무주군 안성면이다. 두 지역에 사는 지게꾼들이 동서를 넘나들던 길이다. 안성면 쪽으로 내려가는 서쪽 사면에 눈이 더 많아서 겨울 산행 코스로 제격이다.

나무들이 헐벗은 겨울에만 보이는 겨우살이.

나무들이 헐벗은 겨울에만 보이는 겨우살이.

1200m, 1100m, 1000m. 해발 고도가 낮아질수록 쌓인 눈이 낮아졌고 숲은 깊어졌다. 점차 키 큰 나무들이 나타났고, 정상부에선 듣지 못했던 새 소리도 들려왔다. 가지 앙상한 겨울 나무에선 기생 식물 겨우살이가 매달려 있었다. 덕분에 하산 길도 따분하지 않았다.

동엽령 코스로 하산하면 참나무, 서어나무, 소나무 군락이 연이어 나타난다.

동엽령 코스로 하산하면 참나무, 서어나무, 소나무 군락이 연이어 나타난다.

느긋한 하산 길, 다급한 목소리로 다가온 산행객을 여럿 마주쳤다. "여기가 동엽령 코스 맞죠? 안성 탐방 지원센터까지 얼마나 걸려요?" 인터넷 산악회 사람들이었다. 덕유산국립공원 윤희도 안전관리반장은 "덕유산은 곤돌라가 있어서 쉽게 생각했다가 조난을 하거나 저체온증을 겪는 등산객이 의외로 많다"며 "자기 체력에 맞는 코스를 고르고 산행 장비를 철저히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안성 탐방 지원센터에 도착할 즈음 해가 산등성이로 기울고 있었다. 휴식시간까지 합쳐 6시간 반을 걸었다. 정확히 2만 보가 찍혔다. 무릎이 시큰했다.

여행정보

무주리조트 관광 곤돌라는 주말에 한해 예약제로 운영한다. 상고대를 보고 싶다면 곤돌라를 일찍 타는 게 좋다. 스키 시즌에는 상행선이 오전 9시부터 운영한다. 설천봉에서 출발하는 하행선은 오후 4시 30분까지다. 어른 편도 1만4000원, 왕복 1만8000원. 이번에 걸은 코스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랐다. 이 코스대로 걷는다면 안성탐방지원센터에서 콜택시를 타고 출발지로 가면 된다. 산에서 간단하게 요기했다면 하산 후 든든히 식사를 챙기는 게 좋겠다. 무주리조트 들머리, 구천동계곡 쪽에 식당이 모여 있다. 이번에는 버섯 요리를 잘하는 ‘산들애’를 가봤다. 혼자라면 능이숫총각버섯탕(1만6000원), 여럿이라면 능이버섯샤브샤브(2만1000원)를 추천한다. 무주군청 옆 ‘금강식당’ 어죽(8000원)도 든든한 보양식으로 추천한다.

무주구천동에 자리한 식당 '산들애'에서 먹은 능이숫총각버섯탕.

무주구천동에 자리한 식당 '산들애'에서 먹은 능이숫총각버섯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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